지난 토요일 외출에서 돌아오는 길.
내 옆에 승용차 한 대가 스르르 멈춘다.
썬팅 한 창문이 내려오며 반가운 얼굴이 보인다.
우리 수필반 어르신으로 항상 멋진 글을 써 오시는 박 선생님.
5년째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신 사모님 면회 다녀오시는 길이란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종종 뵙는다.
뵐 때마다 사모님에게 가실 준비로 마트에 다녀오시는 길, 아니면 사모님 면회 다녀오시는 길이었다.
선생님을 생각하면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지난겨울, 사모님이 좋아하신다는 과자를 손수레에 가득 싣고 눈보라 속을 불편한 걸음으로 걸어오시던 모습이다. 나는 그날 이후 눈보라 치는 날이면 그날의 선생님의 모습이 떠 오르며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 나그네가 연상된다. 그 곡은 주로 고독, 슬픔, 상실감을 표현한 '빌헬름 뮐러'의 시로 사랑에 실패한 주인공이 길을 떠나는 감성적인 여정을 그리고 있다. 그 시는 사랑의 실패지만 선생님은 사랑을 완성시키는 과정이리라. 그때 나는 부부지간의 사랑과 책임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 겨울이 지나고 또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로 접어든다. 그러나 병상에 계신 사모님에 대한 선생님의 사랑은 더 깊어지시나 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다. 선생님을 뵈면 긴 병에 효자는 없을 수 있지만 부부지간의 순애보는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몸이 불편해도 또 아내가 자기를 못 알아봐도 아내의 곁을 지키고자 하는 그 모습은 단순한 연민을 넘어 깊은 사랑과 헌신을 담고 있다. 선생님께서 보여주시는 진심은, 주위환경이 어떻게 변하든 간에 변하지 않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아내를 향한 따뜻한 마음으로 진정한 사랑의 가치를 보여주는 상징이리라.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주차장으로 들어서는 선생님의 차를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을 하며 미소 지었다.
선생님이 나를 보고 창문을 열면서 '야, 타' 하고 외치셨더라면 나는 그 차를 얼른 집어타고 그 선생님의 아내를 향한 끊임없는 사랑에 대한 칭찬을 아낌없이 해 드렸을 텐데.^^
20여 년 동안 아내의 병상을 지킨 김형석 교수님은
'나는 그것을 '인간애'의 과정이라고 느끼면서 체험했다. 인간이기에 인간다운 사랑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불행한 이웃도 돕는 것이 인간의 정이다. 평생 동반한 사람을 위해 10년, 20년 사랑의 짐을 나누어 갖는 것은 당연한 도리다. 그 짐을 진다는 것은 주어지는 사랑의 행복일 수 있다.'
김형석 교수님의 100년의 지혜를 다시 한번 곱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