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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정애 Nov 11. 2024

저 할머니가 누구지?

우리 집 화장실 입구에는 전신 거울이 있다. 그 거울 앞을 스칠 때마다 낯선 할머니가 어른거린다.  

"저 할머니가 누구지?" 엄마인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거울 속의 할머니가 대답한다. 

'너지 누구야, 너의 현실 버전, 인정해.'  


잠시 서서 거울 속의 할머니를 바라본다. 푸시시 가늘어진 머리카락, 가르마에 확연히 나타나는 흰머리, 축 처진 눈꼬리, 처진 눈꺼풀을 올려보겠다고 눈을 치켜뜨면 이마에 잡히는 굵은 주름, 입술주위의 고양이 주름, 코 옆 팔자주름 그 밑에 또 하나 팔자가 그려진 입꼬리, 그야말로 쌍팔 자다. 거기에 주글주글 목주름.  


그 할머니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쉽지 않다.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젊은 시절의 내 모습. 머리카락이 풍성해서 파마를 할 때면 숱이 많으니 파마비용을 더 내야 한다는 미용사의 농담을 들었었고, 얼굴은 주름 하나 없이 팽팽했던 그 시절로 잠시 시간 여행을 한다. 


바로 그때 TV홈쇼핑이 방영된다. 유리알처럼 탱탱한 피부를 가진 젊은 쇼호스트가 자신감 있는 말투로 설명을 한다. 

“이 세럼만 바르면, 피부 속 깊숙이부터 채워져 주름이 쫙 펴지고, 피부가 탱탱해지며, 바르는 즉시 10년은 젊어 보여요. 저는 물론 우리 엄마, 이모 모두 바르잖아요. 이제 팔자 주름 걱정 마세요."


'그래, 저거다! 주름아 기다려라 다 없애버려 주마.'

 마치 그 화장품이 나의 시간을 되돌려 주리라는 착각에 빠지며 어느새 나의 손은 홈쇼핑 앱을 열고 있다. 

 

'동작 그만' 순간,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동작을 멈추고 나의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인다. '

'지난번 쇼호스트의 말에 홀려 산 화장품도 별 효과 없었잖아, 그뿐인가, 머리카락이 풍성해 보일 수 있다는 헤어제품도 몇 가지나 샀는데 모두 실패였잖아. 그런데 또?'


'아, 그래도 저건 다를 거야. 먼저 번거 보다 비싼 거잖아, 쇼호스트가 저렇게 확신에 차서 말하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잖아? 비포, 애프터가 확실히 다르잖아.'

젊은 쇼호스트의 유리알 같은 피부가 나의 지름신을 자극한다.

앱을 다시 열고 결재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다시 한번 내 목소리가 들린다. 차분한 음성이다. '있는 화장품이나 다 쓰고 사'

 

과감히 TV를 끄고 다시 거울 속의 나와 대화한다. 주름은 나의 시간의 흔적이자 경험의 상징이리라.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나의 역사, 나의 지혜, 나의 경험, 나의 추억이 얼마니 소중한가. 나이가 들면서 얻어진 지혜와 추억이 담긴 얼굴을 내가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인정해 주나. 지금까지 남들이 흔히 하는 성형은 물론 보톡스 한 번 안 맞은 나를 대견해했다. 자연스럽게 나이답게 늙어가자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생긴 대로 만족했고, '내면을 가꾸는 것이 더 중요해' 라며 독서하고 글 쓰고 마음 닦으며 나름 지혜를 쌓으며 교양인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동안 쌓아온 지혜는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값지게 느껴질 테니까. 

그런데 요즘 거울 속 나와의 대화는 여전히 난해하다. '거울아, 이 할머니, 좀 덜 놀라게 해 주면 안 될까?" 그러면 거울 속의 할머니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인정하라고 이 모습이 바로 너라고. 그래도 그만하면 잘 늙었다고. 


헤르만헤세는 '늙는다는 것은 마냥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와 마력, 지혜, 그리고 고유한 슬픔을 지닌다고 말한다. 노인이 젊어 보이려고만 하면 노년은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만다. 나이 든 사람에게 더 적합한 것은 유머와 미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 세상을 하나의 비유로 변화시키는 것, 사물을 저녁 구름의 덧없는 유희인 양 바라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다시 거울 속의 나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내 삶에 소중한 순간들을 머금고 있는 잔주름이 사랑스럽게 보인다.

거울을 통해 비치는 내 모습이 아니라, 내 마음속의 나를 더 사랑해 주기로 결심한다. 


헤르만 헤세의 말을 다시 한번 새기며 헤세의 시 한 편 꺼내 본다.


<부러진 나뭇가지의 삐걱거림>


툭 부러진 나뭇가지

벌써 여러 해 동안 그대로 매달려

바람 불면 삐걱대며 메마른 노래를 부른다.

잎사귀도 다 떨어지고, 껍질도 없이

벌거벗고 창백한 모습 기나긴 인생길에

기나긴 죽음의 길에 이젠 피곤한가 보다

그래도 단단하고 끈질기게 울리는 그의 노랫소리

버팅기는 소리 하지만 남몰래 두려운 소리

여름 한 철 만 더

겨울 한 철 만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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