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친구 부부와 남도 여행길에 올랐다. 겨울여행은 단어 자체만으로도 낭만적이다.
경부고속도를 타고 가다 천안 지나며 서해안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겨울 한가운데의 산천은 추위를 견디며 묵묵히 자기 길을 가고 있다. 나도 자연의 묵묵함을 닮고 싶다. 영암에 도착하니 우리를 기다리던 선배 부부가 준비해 놓은 푸짐한 낙지요리는 남도의 정을 듬뿍 느끼기에 충분했다.
이튿날 아침 우리 세 부부는 서둘러 해남을 거처 진도로 향했다. 아직까지 진도가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인 줄 알았던 내게 1984년 완공되었다는 진도 대교와 2005년에 새로 개통된 쌍둥이 다리인 제2진도대교는 우리나라의 발전상을 내게 보여줌과 동시에 나의 무지를 일깨워 주었다. 옆으로는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위엄 있는 자세로 굉음을 내며 흐르는 명량해협(울돌목)을 지키고 있었다. 이 빠른 물살을 이용해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크게 물리친 곳을 바라보니 내 마음도 뭉클해진다.
펜션에 여장을 풀고 펜션 주인이 준비해 놓은 평상시 먹어 보지 못한 남도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점심상을 받으니 절로 행복이 충만해진다.
점심 식사 후 진도 아리랑 마을 관광지에 들러 남도 전통문화예술의 산실인 국립 남도국악원, 아리랑 체험관에서의 역사 아리랑 전시실, 이야기 팔도 아리랑 전시실, 진도 문화지도, 진도의 전통놀이, 노래 아리랑 체험실 등을 둘러보니 남도문화의 얼이 살아 숨 쉬는 느낌이 전해진다. 아리랑 체험관에서 나오면서 내려다보이는 귀성 포구는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남도진성(고려 원종 때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 잘 보존되어 있고 특히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남문 앞으로 흐르는 세운천 위에 놓인 단운교와 쌍문교의 단아함이었다. 다듬지 않은 편마암으로 자연스러움과 정교함을 같이 간직한 다리는 한참 동안 내 마음을 그곳에 머물게 했다.
그다음 진도 여행의 일번지라 불리는 운림산방에 들러 진도 그림의 뿌리를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운림산방은 조선 후기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이 살면서 그림을 그리던 곳으로, 이후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라며 남화의 맥을 잇는다. 허련은 진도 태생으로 이웃 땅인 해남 녹우당의 화첩을 보며 그림을 익혔는데, 대둔사에 머물던 초의선사의 소개로 서울로 올라가 김정희에게 그림을 배우게 되면서 그만의 화풍을 만들어간다.
스승인 김정희가 죽은 후 허련은 고향으로 내려와 작품 활동을 펼치며 한국 남화의 맥을 형성한다. 남화 또는 남종화라고 불리는 화풍은 전문 화원들이 그리던 북종화와는 대비되는 그림으로 수묵을 가지고 담대하면서도 자유로운 형식으로 선비의 마음을 담아 그리는 산수화를 말한다.
종종 영화나 드라마가 촬영되기도 해 눈에 익은 연못이 보이고 뒤로 허련이 살았던 운림산방이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에서는 허련의 작품을 비롯해 그의 손자인 허건의 작품까지 남화를 대표하고 흐름을 살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전시관과 함께 있는 진도 역사관에서는 진도의 옛 모습에서 지금까지 그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림산방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국내 여행 1001, 2010.1.15, 마로니에북스)”
소치 선생의 작품 옆에 붙어 있는 글이 내 발길을 붙잡는다.
‘하늘에 올라 신선이 되어보기도 하고
불법에 귀의하여 부용을 잡기도 하였으나
나 스스로 돌아보며 쓸쓸히 웃으며
오로지 그림만 그렸도다.
세 번 바다로 들어갈 때 세상은 망망했으나
예는 하늘에 통 하도다.
임금님의 은혜를 입었으나 은총 아득해지고
왕릉에 심은 나무 가지만 무성하도다.
과천 길에 이르러도 스승은 이미 가고
아련히 붓을 잡으니 백발이 앞을 가리누나
애달프다 저 세상 가는 길목
나는 어디로 가야 할고
육신의 형체를 벗어나 영혼조차 날아가 버리고
두어 개 산 봉우리 솟아 담담할 뿐
이것이 시(옳을 시)인가 비(아닐 비)인가.’
같은 장소에 위치한 진도 역사관, 남도 전통 미술관을 둘러보며 예술의 허기를 맘껏 채웠다.
펜션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어느새 황홀한 낙조가 구름 사이로 붉게 떨어지고 있다.
우리 부부의 인생길도 저 아름다운 낙조처럼 아름다운 여운을 남기고 싶은 생각이 밀려온다. 일출이 찬란하듯 낙조 또한 황홀하지 아니한가. 저 혼자 떴다 지는 태양처럼 우리 또한 자연의 섭리 따라 혼자 제 갈 길을 가야 하지 않는가. 온몸을 불사르며 모든 것을 다 주고 미련 없이 수평선 밑으로 떨어지는 태양처럼 나 또한 태양을 닮고 싶다.
이번 여행을 통해 마음의 복잡함을 비워내고 그 자리에 좋은 마음만 담을 수 있는 공간을 넓히리라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