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6일 오늘의 명언 -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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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돼지와는 씨름하지 말라. 돼지와 씨름을 하면 둘 다 더러워지는 데 돼지는 그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 버너드 쇼


조지 버너드 쇼(영어: George Bernard Shaw, 1856년 7월 26일~1950년 11월 2일)는 주로 버너드 쇼라는 필명으로 활동한 아일랜드 출신의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 연설가, 사회주의자, 사회활동가이다. 그의 영향력은 1880년대부터 사망 이후까지 서구의 연극, 문화, 정치 전반에 드리워져 있다. 그는 5편의 소설과 60여 편의 희곡을 집필했으며, 대표작으로 《워런부인의 직업》(1893), 《인간과 초인》(1902), 《참령 바버러》(1905), 《피그말리온》(1913), 《성 죤》(Saint Joan, 1923) 등이 있다. 희곡을 통해 동시대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비판을 수행한 쇼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가장 중요한 극작가로 평가된다.

더블린에서 태어난 쇼는 1876년 런던으로 이주했다. 런던 이주 초기에 그는 소설가로서 성공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고, 1880년대 중반 무렵에 정치적 각성을 계기로 점진주의적 사회주의 단체인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한 후 저명한 연설문 작가가 되었다. 1892년 첫 희곡 《홀아비들의 집》을 썼고, 1894년 《무기와 인간》으로 처음으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주의 희곡의 선구자 헨릭 입센(Henrik Ibsen)의 영향을 받아 영어권 연극에 새로운 사실주의를 도입했으며,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희곡을 활용했다.

쇼의 견해는 종종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우생학과 알파벳 개혁을 지지했으며, 백신접종과 조직화된 기성 종교에 반대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과 동맹국 양진영을 모두 동등하게 책임 있다고 비난하여 대중의 반감을 샀으며, 전후 영국의 아일랜드 정책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쇼의 정치적 입장이 극작가로서의 위상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의 시기에도 야심찬 작품들을 발표했으며, 대중적 인기와 작품성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쇼는 《성 죤》을 발표한 후 1925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1938년에는 《피그말리온》의 영화 각본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정치와 논쟁에 대한 그의 열정은 줄어들지 않았으며, 1920년대 후반에는 페이비언 협회의 점진주의를 상당 부분 포기하고 개혁 독재의 필요성을 자주 언급했다. 더욱이 무솔리니와 스탈린을 호평하는 표현을 하여 파시즘을 지지한다는 세간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공개 발언을 줄였지만, 사망 직전까지 왕성하게 집필을 이어갔다. 94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1946년 공로훈장을 포함한 모든 국가적 영예를 거부했다.

쇼가 사망한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한 학문적·비평적 평가는 다양하지만, 그는 영국 극작가 중 셰익스피어 다음으로 높은 평가를 꾸준히 받아왔으며 근대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로 인정받는다. 그가 직접 창안해낸 ‘셰이비언(Shavian)’이라는 단어는 버너드 쇼의 사상과 문학의 표현 방식을 함축하는 용어로 자리잡았다.



1856년 7월 26일, 아일랜드 더블린의 중산층 집안에서 1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공무원으로 근무하기도 했던 그의 아버지가 곡물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실패하고 급격히 가세가 기울게 되자, 14세 때 학업을 중단하고 부동산 중개사무소 사환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정규 교육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는 글들을 여러 편 쓸 정도로 그는 학교생활을 싫어했다. 하지만 성악가였던 어머니의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아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 미술, 문학 등에 많은 관심과 지식을 가졌고, 이 덕분에 훗날 음악평론가로까지 활동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실패로 알코올 의존증에 빠져 결국 갱생이 불가능할 정도가 되자, 그의 어머니는 자신을 포함하여 두 딸이 성악가로서 훈련을 제대로 받기 위해 그녀의 음악 가정교사인 조지 존 반달러 리(George John Vandaleur Lee)와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 쇼가 그의 어머니를 찾아 런던으로 떠난 것은 그로부터 5년 뒤, 20세가 되던 1876년이었다. 한 집에서 동거하며 생활한 음악선생 조지 리와의 실제 사이는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그가 아버지도 아니면서 아버지의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 얼마나 싫어했냐면, 이 남자의 이름 역시 '조지'여서 사람들이 자꾸 부자(父子)지간이라고 생각하자, 그 뒤로 자신의 이름을 쓸 때면 'G. 버나드 쇼' 혹은 '버나드 쇼'를 더 자주 사용할 정도였다.

런던에서 그는 대영박물관이나 도서관 등을 오가면서 그간 읽지 못한 책들을 읽고 글을 썼으며, 각종 강의와 논쟁에 참여하면서 스스로 지식을 넓혀갔다. 그는 잠시 전화회사에 취직하기도 했지만, 곧 그만두고 문필가로서의 인생을 본격 시작했다. 25세 때 그는 자신의 직업을 ‘소설작가’로 적었다. 그러나 20대 후반 썼던 소설이나 기고문들은 모두 출판을 거절당했다. 20대 동안의 계속된 실패와 좌절을 통해 그는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는데, 이는 훗날 그가 사회주의자, 채식주의자, 연설가, 논객, 극작가 등으로 살아가는 데 튼실한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크게 감동받아, 1884년 페이비언 협회[3]를 설립하는 등 사회주의자로서도 크게 활약하였다.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그는 희곡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의 초기 희곡들은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점차 런던 무대에서 공연되며 관심을 끌었다. 그는 희곡을 통해 사회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시도하였고, 그 결과 여러 극장이 그의 작품을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20세기 초, 그는 활발하게 희곡을 발표하며 영국과 유럽의 극문학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 잡았다. 《인간과 초인》, 《메이저 바버라》, 《피그말리온》 등은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 작품은 당시 무대에서 꾸준히 공연되었다. 동시에 그는 논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며 사회, 정치 문제에도 목소리를 냈다.

1925년 그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이후에도 집필 활동을 이어갔으며, 1938년에는 《피그말리온》을 영화로 각색한 작품이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하면서 영화계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그는 말년까지 글을 쓰며 여러 사회적 논쟁에 참여하였다.

1950년 11월 2일 영국 하트퍼드셔의 아요트 세인트 로렌스에서 사망하였다.



근대 영국 문학의 가장 독창적인 극작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 말기의 도덕적 위선과 사회 제도의 모순을 작품 속에서 날카롭게 드러냈으며, 단순한 오락적 연극이 아니라 관객이 사유하게 만드는 지적 연극을 제시했다. 이러한 특성은 그를 단순한 극작가를 넘어 사상가적 위치에까지 올려놓았다.

그의 희곡은 유머와 풍자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사회 개혁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피그말리온》과 같은 작품은 언어와 계급 문제를 예리하게 다루며 사회적 불평등을 드러냈고, 《인간과 초인》과 같은 작품은 철학적·정치적 주제를 희곡의 형식으로 담아내며 관객에게 새로운 지적 자극을 제공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희곡이 단순한 감정적 표현을 넘어 사회적 담론의 장이 될 수 있음을 입증했다.

평론가들은 쇼를 영국 극문학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셰익스피어 이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한다. 그는 연극이 단순한 감각적 쾌락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인간의 삶을 비판적으로 조망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로써 그는 유럽 전역과 미국의 연극계에도 영향을 미치며,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재정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그는 극작가로서뿐 아니라 에세이스트, 사회주의자, 논객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했으며, 이러한 다면적 활동은 그의 평가를 더욱 넓은 차원에서 바라보게 한다. 그는 1925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국제적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받았고, 지금까지도 그의 작품은 사회 비판적 문학의 대표적인 예로 거론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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