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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같은 할머니가 될 거야.

by 미나리



길 위의 할머니들을 몰래 관찰한다. 이상하게 동년배인 아줌마들보다 할머니들한테 눈길이 간다. 3, 40대 여자들은 대개 출근 복장이거나, 아니면 정반대인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보는 재미가 없다.

반면에 할머니들은 곱게 차려입는다. 더 이상 빨강, 핑크, 보라 등 100m 밖에서도 보일만한 원색 옷을 입고 다니지 않는다. 내 취향의 꽃무늬, 레이스, 체크 등등의 빈티지룩을 멋들어지게 소화한다. 그러니 안 쳐다볼 수가 없다.

할머니들은 어디서 저렇게 예쁜 옷들을 산 걸까? 다가가서 물어보고 싶지만, 꾹 참는다. 나는 내향인이니까.


이상하게도 나이를 먹는 것이 두렵지 않다. 어릴 땐, 하루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랐고, 20대 때에는 서른을, 30대인 지금은 마흔을 기다린다. 친구들에게 이런 말을 하면 '넌 역시 제정신이 아니야. '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10대, 20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된다. 그때의 불안, 열등감, 방황, 정신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니? 대체 왜?

물론 그들이 바라는 것은 건강한 몸, 생기 넘치는 얼굴, 순수함, 넘치는 에너지 등일 것이다. 나 역시 때때로 그때만 누릴 수 있었던 즐거웠던 기억들이 생각난다.

친구들과, 혹은 방금 처음 본 사람들과도 금세 친구가 되어 밤새 술 마시고 춤을 추거나, 금사빠 대표주자로서 이 사람, 저 사람과 잘도 사랑에 빠지며 매일같이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거나, 쪼리에 배낭 하나 메고 여기저기 발길 가는 대로 떠돌며 여행하던 날들은, 아마 내 인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순간일 것이다.


하지만 아쉬울 것은 없다. 30대를 훌쩍 넘긴 지금은 노력으로 가꾼 정돈된 몸과 얼굴, 수많은 경험으로부터 나온 성숙함과 자유, 그리고 여유를 얻었다.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과 자주 만날 수도 없고, 밤새 놀 수도 없게 되었지만, 지금은 좀 더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서로에게 힘을 주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남아 있다. 새로운 이성과 설렘 가득한 사랑에 빠지는 것은 못하게 되었지만, 남은 평생을 내 옆에 있어줄 안정적인 사랑을 얻었다. 배낭 하나에 운동화도 없이 떠돌아다닐 수는 없게 되었지만, 쾌적하고 아름다운 공간에서 머무르며 마음껏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경제적, 정신적 여유도 생겼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는, 내 인생의 최종 종착지라고 할 수 있는 노년의 모습을 상상하고 계획하는 것이다. 파워 J라(근데 이제 N을 곁들인) 어쩔 수가 없다. 틈날 때마다 내가 꿈꾸는 미래의 어느 날을 그려본다.

'할머니가 된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

염색하지 않은 새하얀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 아름답게 반짝거린다. 주름 진 피부는 보기 좋다고 할 순 없지만, 온화하고 사랑스러운 표정이 깃든 얼굴이 아름답다. 은은한 색감의 디테일한 무늬들이 가득한 원피스와 따뜻한 색감의 가디건을 주로 입는다. 발목을 가리는 양말과 함께 발이 편한 낮은 굽의 구두나 운동화를 신는다. 차곡차곡 모아 온 내 취향으로 가득한 소품으로 가득한 집, 그 안에 햇빛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글을 쓴다. 예기치 못 한 불행한 일이 생기더라도 곧 지나갈 것임을 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도 미소와 함께 친절을 베푼다.


물론, 말로는 얼른 나이를 먹고 싶다고 하면서, 얼굴에 생긴 주름이라도 발견하면 허겁지겁 안티에이징크림을 꺼내 바른다. 뭐, 나이를 먹고 싶은 것과 얼굴에 주름이 생기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니까?

하지만 언젠가 내 얼굴과 몸에 생긴 주름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질 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 수많은 주름들로 완성된, 꽃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을 가진, 향기로운 할머니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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