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여권을 만들러 구청에 갔다. 부모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전화번호를 쓰는 칸이 있다. 안내원이 다가와 설명한다.
"아빠 이름 위에 쓰시고, 아래에 엄마 이름 쓰시면 돼요. "
왜?
엄마인 내가 만들러 왔는데 왜 아빠부터 써야 하지?
별것도 아닌데 괜히 거슬린다.
내 이름을 위에, 남편의 이름을 아래에 적은 뒤, 서류를 제출한다.
여전히 내 삶은 남편과 아이가 먼저다. 아침에 제일 일찍 일어나 남편 출근과 아이 등교를 돕는다. 오후에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간식을 챙겨주고 숙제를 봐주고 학원에 데려다준다. 저녁에는 우리 가족이 먹을 식사를 준비한다. 매일같이 내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들이다. 우리집에서의 내 역할은 주부이니까, 맡은 일을 충실히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게 가족들을 위한 시간을 1순위로 배정하고 남은 시간은 나를 위해 쓴다. 내 삶에서 나 자신이 후순위가 된 셈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결혼을 하지 말 걸 그랬다...
라고 생각하냐고 물으신다면, 아니다.
결혼 전에도 내 삶에서 1순위는 내가 아니었다. 깨어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직장에 바치는 삶을, 내 인생을 산다고 말하기에는 좀 곤란하다. 물론 자신의 일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제외. 아무튼 내 경우에는, 결혼을 한 후 쓸 수 있는 자유시간이 훨씬 많아졌다. 그래서 이렇게 브런치 작가가 되어 쓰고 싶었던 글도 쓴다.
대개 전업주부는 남편을 보조하는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편이 본인의 삶을 주체적으로 산다고 보기는 힘들다. 남편은 아침에 출근하러 나갈 때마다 한숨을 푹 내쉰다. 내 남편의 꿈은 돈 많은 백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을 위해 성실히 일한다.
결혼은 그렇다 치고, 아이를 키우는 삶은 너무 힘들지 않나요? 엄마의 전적인 희생이잖아요. 아이를 낳은 것이 후회되지 않나요?
라고 물으신다면, 그것도 역시 아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나를 잃어버린 다기보다는 (물론 날씬한 몸매는 잃어버리긴 했지만, 아이 때문인지 나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 오히려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 나이 때의 내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리고 내가 다시 그 아이가 되어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그렇게 아이와 함께 한 살씩 다시 먹으며,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하나씩 더 배운다. 아이와의 사랑, 교감에서 나오는 행복은 말할 것도 없다.
결혼과 출산 덕분에 내가 나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1순위는 언제나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항상 간직한다는 전제하에 말이다.
남편과 아이가 나가고 집에 혼자 남게 되면 본격적으로 나의 세상이 시작된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라고 해서 당연히 내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이 시간마저 다른 것에 휘둘려 몽땅 빼앗겨 버린다. 굉장한 방해꾼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TV와 핸드폰이다.
습관처럼 TV를 틀고 나면 어느새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린다. 나름 유익한 내용을 시청했더라도 왠지 찜찜하다. 왜 TV를 보고 나면 항상 죄책감이 들까? 이것도 가스라이팅의 결과인가? 한참 고민하다가 깨달았다. 내가 능동적으로 시청한 게 아니라서 그렇구나. 내 눈과, 내 뇌가 TV에서 내보내주는 대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행위였다. 그래서 TV를 오래 보고 나면 허탈했던 걸까. 그날 이후로 습관적으로 TV를 틀어놓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TV 없이 혼자 밥을 먹는다는 것은, 처음에는 꽤나 외롭고 쓸쓸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핸드폰 역시 내 시간을 도둑질 해가는 주범이다. 피드나 숏츠를 한 번 보기 시작하면 멈출 수가 없다. 흥미롭고 자극적인 제목들이 눈에 계속 띈다. 이걸 안 보고 참는 게 인간의 의지로 가능하다고? 일단 나는 안 된다. 그러니까 아예 시작을 하면 안 된다. 하지만 TV보다 핸드폰을 끊는 게 몇 배는 더 힘들다. 외로워서 그런가.
엄마가 행복해야 온 가족이 행복하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더욱더 당당하게 나의 행복을 1순위로 생각한다. 가정의 중심은 엄마니까 당연하다. 불행한 엄마 밑에서 행복한 아이는 없고, 불행한 아내 옆에서 행복한 남편 역시 없다.
어느덧 날이 선선해졌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생각한다. 이번 계절엔 날 위해 뭘 하면 좋을까? 이번엔 뭘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줄까? 나에게 어떤 순간을 선물할까?
결정했다.
올 가을에는 여름에 못했던 산책도 자주 나가고 조용한 카페에 가서 나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간을 많이 만들어 주기로.
한가로운 평일 낮, 가을햇살을 맞으며 기분 좋은 걸음으로 감성 가득한 카페에 들어가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행복하다.
ㅡ 곧, 가을산책과 카페 이야기로 돌아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THANK YO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