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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의 은밀한 취향

by 미나리


"엄마는 왜 맨날 아줌마 같은 옷만 입어? 내 친구네 엄마는 예쁜 옷만 입고 다니던데. "

아이의 말을 듣고는 옷장을 열어본다. 20대 때는 형형색색의 컬러와 다양한 스타일의 옷들로 가득했던 옷장이, 어느새 무채색의 루즈핏 옷들로 가득 찼다. 심지어 절반 이상은 블랙이다. 내 얼굴은 밝은 색이 잘 어울리지만, 언제부턴가 코디 걱정도 없고 관리도 편하다는 이유로 검은색 옷만 사기 시작했다.


나는 어떤 옷을 좋아하지? 20대 때는 나한테 뭐가 잘 어울리는지도 모르고 그때그때 마음에 드는 옷으로 이것저것 많이도 사댔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심플한 스타일이 베스트라는 것을. 너무 슬림하지도, 너무 루즈하지도 않은 기본핏을 제일 잘 소화했다. 서른을 훌쩍 넘긴 지금은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이 뭔지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이것저것 다양한 스타일의 옷을 살 필요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내 옷장은 점차 단조로워졌다.


하지만 내가 정말로 심플한 옷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다. 잘 어울리는 것일 뿐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비밀이지만, 사실 나는 러블리빈티지룩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꾸준히 꽃무늬, 체크, 레이스, 자수가 있는 옷들을 보면 충동적으로 구매하곤 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나랑은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결국은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의 시련을 경험한 뒤로는 그토록 사랑스러운 옷들의 유혹을 애써 외면해야 했다.


이제는 세월이 지난 만큼 나의 외면도 많이 변했으니 다시 한번 시도해 볼까? 어쩌면 어울릴 수도 있지 않을까? 러블리빈티지 스타일의 옷들을 사모으기 시작했다. 꽃무늬로 가득한 쉬폰 원피스, 샤랄라한 레이스 블라우스, 색감이 예쁜 체크무늬 셔츠, 감각적인 자수가 새겨진 니트, 화려한 무늬의 가디건. 하나둘 구매하다 보니 어느새 옷장이 화려해졌다. 매일 칙칙한 옷들만 사다가 화려한 옷들을 사니 보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부푼 마음으로 새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본다. 생각보다는 나쁘지 않지만 여전히 잘 소화해 낸다고 볼 수는 없다. 모임에 입고 나가기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혼자서만 몰래 입고 다닌다. 이 나이에 살짝 주책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쇼핑을 멈추진 않는다. 왜냐하면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조크든요.


취향이란 게 이런 걸까? 별것도 아닌데 일상이 행복해진다. 옷 말고 다른 분야는 어떨까? 번쩍번쩍하고 새하얀 가구보다는 살짝 오래된듯한 느낌의 어두운 원목제품을 좋아한다. 커튼, 침구류도 컬러감이나 무늬가 있는 게 좋다. 음악은 잔잔한 올드재즈, 영화는 고즈넉한 시골배경에 딱히 이렇다 할 이야깃거리가 없는 스토리를 좋아한다. 그러고 보니 내 취향은 완전히 '빈티지' 그 자체였다. 20대 때에는 언제나 친구들, 혹은 동료들과 함께였기 때문에 내가 뭘 좋아하는지, 내 취향이 무엇인지, 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해야 행복한 사람인지. 이 나이에만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나는 여전히 펑퍼짐한 블랙 원피스를 즐겨 입고, 주말의 절반은 키즈카페에서 보내고, 집 안에는 동요가 울려 퍼지고, TV 속 만화영화를 더 자주 보지만, 그래도 내 취향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안다. 가끔씩 아이를 꼬드겨 예쁜 원피스를 입고 멋진 인테리어를 한 카페를 가기도 하고 혼자만의 자유시간이 생겼을 때에는 내 취향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본다. 집안 곳곳에 빈티지스러운 소품들을 하나씩 채운다. 그렇게 내 마음의 양식을 스스로 야금야금 챙긴다.


"엄마는 왜 할머니 같은 옷만 사?"

새로 산 내 옷들을 보고 아이가 말한다. 부정할 수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언젠가 할머니가 되면 러블리빈티지룩을 더 잘 소화할 수 있다는 뜻? 내가 얼른 할머니가 되기를 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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