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내 시간을 완벽하게 잃었다. 아침, 낮, 밤, 새벽 모두 아이와 함께였다. 아이의 밥, 잠, 똥을 위해 나의 밥, 잠, 똥은 포기해야 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잠깐의 휴식을 취할 수는 있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긴장 속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드디어...!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나 혼자 있다니, 이게 대체 얼마만이야! 온 집안을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기쁨의 환호를 질렀다. 나는 이제 자유다! I'm free!
이 날만을 기다리며 리스트까지 작성해 두었다. 혼자 카페투어하기, 운동하기, 독서하기, 글쓰기, 공부하기, 산책하기 등등. 그런데 어쩐지 리스트를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집에 돌아와 집안일을 하고 중간중간 쉬는 시간을 가지다 보면 어느새 금방 하원시간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나만의 루틴을 만들자. '
꼭 필요한 일들을 제외하고는, 집에 혼자 있을 때에는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을 우선순위로 두기로 했다. 주부들은 주로 아이와 남편과 함께 있는 오후~밤 시간 대가 가장 바쁘다. 오전 시간까지 내 시간으로 만들지 못한다면, 하루 종일 주부, 엄마, 아내로만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오전만큼은 내 인생을 살기로 다짐했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돌아오면 어질러져있는 집안부터 정리한다. 집안일을 한다는 개념이라기보다는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에 있는 것을 좋아하는 나를 위한 행위이다. 그런 다음, 잔잔한 재즈음악과 함께 커피를 내린다. 그동안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해 예쁜 접시에 담는다. 매일 반복하는 똑같은 행동이지만, 언제나 확실한 행복을 준다.
식사를 마치면, 책상에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공부를 한다. 요즘은 '브런치스토리'에 푹 빠져있어서 글쓰기에 전념 중이다. 프로망상가라 머릿속에 항상 생각이 끊이지 않지만 딱히 털어놓을 곳도 없어서 날려버리곤 했었는데, 이제는 브런치에 차곡차곡 기록한다. 글 쓰는 것을 해본 적도 없고, 배운 적도 없어 부족한 글이지만, 글쓰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멈출 수가 없다. 드디어 내 진짜 취미를 찾은 것 같다. 요즘 내가 세상과 소통하는 거의 유일한 통로이다. 물론 온라인상에서도 내향성을 버리지 못해 소통에는 여전히 서툴지만 말이다. (대신 맞구독은 잘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꾸벅. )
아이를 데리러 가기 전, 마지막으로 운동을 간다. 헬스를 하거나, 필라테스, 요가를 배우기도 한다. 거울을 봤을 때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건강해지고 있는 것은 맞는 것 같다. 칠 수 있는 중량도 (아주 천천히) 늘고 있고, 유연성도 좋아졌다. 운동을 시작하고는 먹성도 좋아졌다. 이대로라면 튼튼한 돼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모든 루틴을 뒤로하고 산책을 나가기도 한다. 산책을 나간 날엔 꼭 예쁜 카페에 들른다. 결혼 전의 나는 혼자서 뭔가를 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혼자만의 자유로운 시간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행복하다. 피부를 훑고 지나가는 바람, 초록색의 풀내음, 파란 하늘의 폭신폭신한 흰 구름, 귓가에 지저귀는 아름다운 새들의 노랫소리들이 산책길을 가득 채운다. 공기를 잔잔히 메우는 음악소리, 짙은 고동색의 원목테이블, 투명한 화병 안에 담긴 싱그러운 꽃들, 예쁜 컬러감의 체크무늬 커튼과 화려한 레이스테이블보로 정성스레 꾸며져 있는 카페에서, 혼자가 아니었다면 느끼지 못했을 모든 것들을, 모든 감각을 동원해 꾹꾹 눌러 담고 돌아온다.
불량주부 아니냐고? 나도 한 때는 그런 생각이 들곤 했다. 남편은 힘들게 밖에서 일하고 있는데 난 너무 편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 아닐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따져보면, 여전히 가족들을 위한 노동으로 하루에 무려 8시간 정도를 할애한다. 정확히 법정노동시간에 부합한다. 심지어 주말은 더 바빠서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그러니 죄책감은 갖지 않기로 했다.
평일의 작고 소중한 여유시간을 어떻게 하면 더 알차고, 뜻깊게 즐길지 늘 고민한다. 더위가 꺾이면 집 근처 하천으로 산책도 나가고, 독립서점에서 책도 한 권 사고, 빈티지옷가게에 들러 가을옷 구경도 하고, 여름 내 가지 못했던 옆동네 신상 카페들도 찾아갈 계획이다. 가을이 오기를, 느릿느릿 선선한 바람을 손꼽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