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괜찮으니까 걱정마! (앞 이야기)

Ah,Free,ka!

by 슈나

살면서 처음 겪어보는 상황에 마주칠때마다 새로운 경험이 늘어난다고 생각해서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싶은데, 이런 경험은 늘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다.


조벅에서 보츠와나를 가던 국제버스가 생각보다 한산해서 좋았는데, 프리토리아에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들더니 빈자리가 하나도 없이 채워지고 말았다. 그러나 내 옆에는 운 좋게도 덩치 큰 성인대신 작고 마른 남학생이 앉았다. 아싸, 긴시간을 쾌적하게 갈 수 있겠단 생각에 음악을 듣고 있었다.

봐도봐도 아름다운 남부 아프리카의 창밖의 풍경에 감탄하며 가고 있는데 차장언니가 자꾸 내 옆의 학생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음악 볼륨을 높이고 무시하려는데 계속 말을 하고 있으니까 대체 무슨일인가 하고 이어폰을 빼고 들어보니,


학생이 미성년자인데 보호자가 없이 혼자서 국경을 넘는거라서 몇가지 서류가 필요하다는거다.

그런데 학생이 챙겨온 서류는 날짜가 지났던가 아니면 날림서류인가 어쨌든

그래서 이민국의 확인이 안될거고,

그러면 이 어린 승객의 남아공 출국/보츠와나 입국 수속에 차질이 생길거고,

그렇다면 이 승객을 태운 버스가 곤란해지니까

그냥 여기서 내려서 반대쪽에서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도로 프리토리아로 돌아가라는 거다.

하지만 이 어린 승객은 내려서 돌아갈 생각이 전혀없고 그대로 보츠와나로 입국을 해야 한다고 고집을 피운다.


차장언니의 말에 의하면,

이 국제버스의 공식웹사이트에서 버스표를 샀다면 승객정보를 입력해야 했을테니까 그때 아예 걸러낼 수 있었을건데, 학생의 티켓이 수퍼마켓 티켓 오피스에서 발권한거라서 그런 절차없이 아무에게나 발행이 되어서 몰랐다고 한다.

이 버스는 남아공 조벅을 출발해서 보츠와나 가보로네까지 가는 국제버스라서 모든 승객들이 제대로 출국을 하고 입국을 해야되는데,

한명이 늦어지면 모든 승객이 다 기다려줘야 하니까 도착 시간에도 지장을 주고,

늦어지는 건 둘째치고, 이 서류로는 부족해서 아예 입국이 안될건데 국경에서 어쩔 셈이냐고

그러니 다시 출발했던 프리토리아로 돌아가야 한다는 거다.


문제는

이 학생이 프리토리아에서 지냈던 곳은 학교 기숙사인데, 방학기간이라서 기숙사가 문을 닫기 때문에 돌아가도 지낼 곳이 없다고 한다. 프리토리아에서 이 버스를 태워준 사람은 돌아가신 엄마의 친구분인데, 그 집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고...보츠와나로 입국을 하면 국경에 친척분(Aunt 라니까 이모 혹은 고모 혹은 숙모)께서 마중을 나오실거라서 꼭 보츠와나로 가야한다고 했다.


필요한 서류를 보츠와나에서 마중오실 보호자가 준비해서 가지고 이민국으로 와 줄수는 없는 것인가?

그래서 학생은 여기저기 전화를 하기 시작했는데 모두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받아도 뭔가 명확한 이야기가 오고가는 것 같진 않다.

차장언니는 계속 학생에게 전화 받았어? 뭐래? 오신대? 라고 닥달을 하고,

전화로 뾰족한 방안을 찾지 못한 학생은 모르겠다고 대답할 수 밖에 없고,

그 와중에 함께 걱정하던 옆자리 여자(=나)는 또 잠이 들고 말았다...(하아,정말 한심하게도 잠이 왔다...)


자다가 눈을 떠서, 반사적으로 학생에게 전화통화 했냐고 물어봤는데 아직 연결이 안된다고 한다.

순간 내 머릿속에는


플랜 A. 내가 이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서 함께 보츠와나에 입국을 한다.

그리고 예약한 숙소에서 함께 지내며 친척을 찾아본다.

플랜 B. 함께 프리토리아가 아닌 내가 사는 케이프타운으로 돌아간다.

만약 이 아이의 출입국이 허가되지 않는다면 보츠와나 숙소를 취소하고 (환불이 되려나ㅠㅠ) 다시 케이프타운으로 데려간다. 방학이 끝날때까지는 내방에서 지내면 되긴 하는데 그 다음엔 어쩌지?

플랜C. 함께 한국으로 간다?

만약 이 아이가 지낼곳이 아무데도 없다면 내가 얘를 데리고 한국으로 가면 우리 부모님이 뭐라고 하시려나? 나는 배우자도 없고 월급도 적은데 입양이 가능한가...? 아, 자신이 없지만 얘가 고아가 될 순 없는데 어쩌지?


그래서 일단 아이에게 말했다.

국경에 나와 계시는 친척분은 확실한거지? 그럼 그분께서 보충 서류를 만들어 오시면 되는거아냐?

그랬더니 맞단다. 본인도 저 차장언니가 왜 이렇게 일을 심각하게만 바라보는지 혼란스러운 모양...

그럼 일단 국경까지 가서 생각하자. 만약 국경에서 숙소가 필요하면 내가 최대한 도와줄게.

그리고 차장언니에게 슬쩍 말해봤다.

근데 내가 얘 보호자라고 하고 같이 입국하면 안돼?

차장언니가 어림반푼어치도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야, 그걸 이민국에서 믿으라고? 둘이 무슨관계라고 할건데?

음....친구?

하, 아마 아무도 안믿어줄걸!


...플랜 A 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좌절하여 휴게소에 도착했는데, 뭔가 먹을거라도 사주려고 했더니 이친구가 괜찮다고 사양해서 화장실만 다녀오고 다시 버스에 올랐다.

그런데,

조금 늦게 탄 이 학생이 나에게 고맙다고 음료수를 하나 건네주었다.

내가 뭘 했다고 고마워...(이제 난 음료수까지 받았으니 이 아이를 지키고 싶다!)

눈물의 에너지음료를 마시며 버스는 점점 국경을 향했고, 어렵게 연락된 친아버지는 국경과 멀리살아서 서류를 들고 와줄수 없다고 한다.


순간 떠오른 플랜 D!

그럼 이 학생이 입국이 거부되어서 국경에 있으면, 내가 보츠와나에 들어가서 그 아버지가 있는 곳에 가서 서류를 받아서 다시 국경에 갖다주면 되는거아냐?

허나 아쉽게도, 분하게도, 그 아버지는 서류를 준비 해 줄 생각 조차 없다고 한다.


(뒷이야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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