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인가요? 나의 장애인가요?
어릴 적 학교에서나,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람들과 조금 이야기해보면 항상 해오는 질문이 있다.
‘저기..궁금한데 어쩌다가 안 들리게 된 거예요? 부모님 마음 많이 아프셨겠다’라는 말을 늘 듣곤 했다.
어릴 적은 크게 상처였지만 지금은 그저 신경안쓰게 된 질문 중의 하나.
나를 만나는 사람들은 보통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던 것 같다.
나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
나의 장애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
보통 지금까지 나와 연을 맺고 잘 지내오는 사람들을 보면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나의 장애에 대해 궁금해하던 사람들은 대게 호기심으로서 나에게 접근했을 뿐, 오랜 관계를 이어나갈 만한 동력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나의 장애에 대한 답변을 얻고 나면 더 이상의 연결고리가 없었기에... 그래서 사실 저 질문을 듣고 나면 '이 사람은 그냥 나랑 몇 번 스치고 말 사람이구나' 라는 생각에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
어릴 적 그 질문을 받을 때, 상대방이 무례하다는 생각과 씁쓸했던 기억이 난다. 누구나 아픈 치부를 들춰내길 바라진 않는 것처럼 답은 있지만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은 부분이기도 하다. 사실 안 들리게 된 것이 기억나진 않는다. 물론 어릴 적 열병을 앓고 그 이후로 청력을 잃었다는 사실은 들어 알고 있고 의식이라는 것을 갖게 된 이후로 안 들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황이 된 나였다. 좋은 일은 아니기에 타인에게 스스로 말하고 싶은 부분이 아니기도 하다. 최근 즐겨보는 장애 관련 유튜브 채널에서 들었던 사례가 인상 깊었다. 독일에서 나이 어린 소년이 휠체어를 탄 유튜버의 모습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처럼 당연히 무언가 한마디 하거나, 신기하게 쳐다본다거나 할 줄 알았는데 신경도 안 쓰고 본인 갈 길을 가버린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적 보청기를 낀 상태에서 머리를 묶었던 일이 있는데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본 기억이 난다. 단순히 머리를 묶었을 뿐인데 마치 동물원의 동물이 된 것처럼 나를 쳐다보던 사람들의 시선들 때문에 그 후에 밖에서 머리를 묶거나 하는 행위를 잘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예전 사진을 보면 머리를 풀고 찍은 사진들이 거의 대다수이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결과가 있을 때, 왜 그런지에 대한 이유를 찾곤 한다. 하지만 상대방에게 안 좋은 일에 대해 왜라는 이유를 찾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 생각한다. 예를 들면 장애를 갖게 되거나, 부모님이 돌아가시거나 결코 유쾌한 얘기는 아니고 스스로 꺼내지 않는 이상 남이 물으면 실례가 될만한 이야기 일 수 있다. 사실 난 난청인의 삶을 이미 살아오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이미 익숙해졌기에 조금은 둔감해지고 친한 친구들에게야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기는 하다. 하지만 누군가 잘 모르는 사람이 부모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물어본다면 정말 마음이 아프다. 내 귀가 안 좋아지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살아오는 과정을 모두 함께 해온 부모님. 그러기에 그런 질문들 자체가 배려 없고 부모님의 아픈 과거를 상기시키기에 더 속상해지곤 한다.
4년 전, 호주여행 중에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셀프주유소에서 하지절단된 분이 아주 천천히 걸으면서 기름을 넣으셨는데, 신기하게도 주변에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물론 그 덕에 뒤에 있던 차들이 기름 넣는 시간이 지연되긴 했지만 그저 불만 없이 기다리던 모습들. 각자의 다른 개성이 모여 하나의 모습을 이루던 사회. 그냥 나의 존재로서 온전하게 있을 수 있던 그 짧은 순간들이 가끔 그리워지곤 한다.
결국 나라는 사람의 본질은 장애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 자체에 있는 것이다.
주변에 혹시 장애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일이 있다면 장애에 대해 궁금증을 갖지는 않길 바란다. 어차피 관계가 계속 이어지는 사이라면 나중에라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같이 인간관계가 점점 어려워지는 시대에는 그런 불편한 질문과 시선 없이 그저 사람과 사람으로서 마주할 수 있는 시간이 정말 소중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