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기분이 들잖아요 - SYML, Girl

by 윤슬


꿈이란 덧없는 연기 같아서,

기억은 그 꿈을 손쉽게 털어버린다.

현실은 망각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현실이란 만만치 않은 상대다.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고,

우리의 심장을 무겁게 만들고,

때로는 우리의 발아래서 산산이 부서지기도 한다.


현실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탈출구는 어디에도 없다.

매 순간 가는 곳마다 우리와 동행하기에.

우리의 여행길에서

현실은 매 정거장마다 먼저 와서 우리를 맞이한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현실』 중에서



좌절과 절망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조용한 희망』. 현실이란 땅에 두 발을 내리고 살아가며 휘청대는 우리들의 적나라한 현실은 주인공 알렉스를 통해서 느낄 수 있었다. 그 상황을 보며 떠올려진 시의 한 구절이다.


힘든 현실과 예상치 못한 일을 맞닥뜨리며 허우적대다 보면 무탈하게 흘러가는 일상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그 일상이 얼마나 그 사람을 구하고 있는지, 얼마나 소중한지 모른다. 그럴수록 일상이 주는 평범함의 가치는 더 깊게 다가온다.




이 드라마의 한 장면은 일상의 평범함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역설적으로 일깨워준다.

학대 피해자가족을 위한 쉼터로 딸과 함께 다시 들어오게 된 주인공 알렉스. 옷 한 벌 챙겨 나오지도 못했던 그녀에게 쉼터 관계자는 한편에 있는 쇼핑룸으로 그녀를 데려간다. 필요한 옷이나 신발을 그냥 가져가는 것이지만, 그 방식은 일반 쇼핑센터와 다르지 않았다. 색깔별로 종류별로 잘 정돈된 옷들엔 모두 새것처럼 택이 붙어있고, 계산대와 장바구니도 있으니 말이다. 단, 가짜 현금과 가짜 카드만 있을 뿐.



어리둥절해하며 망설이던 그녀는 상점 직원에게 묻는다.

" 다 공짜인데 왜 계산대가 있어요? "

" 평범한 기분이 들잖아요. "



평범한 기분.

사람이 힘든 일을 겪고 좌절 속에 있으면 어떤 마법 같은 특별함을 바라지도 않게 된다. 그저 내 주위에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무탈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일상을 잘 유지하며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평화는 찾아오기 때문이다.



점원은 알렉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 모두 처음에 오면 어쩔 줄 몰라해요. 겪은 일이 있으니까 사고회로가 완전히 마비돼서요. 난 처음에 제일 좋아하는 색깔 기억나는 데 몇 주가 걸렸죠. "라고.


나에게서 멀리 엇나가버린 회전추를 다시 맞추는 데는 시간이 걸릴지도 모른다. 평범함조차 사치처럼 느껴지는 힘든 길을 겪고 있는 순간들도 분명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평범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물 한 방울을 일상으로 적셔야 한다. 인생은 원래 고통이 수반된다. 일상에서 보석 같은 순간을 발견하려는 시선을 넓고 깊이 가져감으로써 각자의 고통을 늘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며 삶을 대하면 더 단단해지지 않을까.


류시화는 『시로 납치하다』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들의 소소한 일상은 얼마나 축복된 시간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큰 기회이다. 물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 아니라 두 발로 땅 위를 걷는 것이 기적이다. 삶은 수천 가지 작은 기적들의 연속이다."라고 말이다.




그저 평범함을 바라는 나의 일상의 조각들은 무엇이 있을까?

이른 아침 출근시간 지하철 인파에 섞여 출구를 향해 걷는 일,

늘 그 자리에 서 계시는 전단지 나눠주시는 분에게서 광고지를 무심하게 받는 일,

그 길로 단골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을 들고 일터로 향하는 일,

퇴근길 하늘을 올려다보며 매일매일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발견하며 감탄하는 일,

늘 가던 마트에서 그날의 반찬거리를 고르고,

계산대 앞 익숙한 점원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

저녁밥을 서둘러 지으며 KBS 클래식 라디오를 켜는 일,

손으로 툭툭 양상추를 뜯어 물에 씻어내 야채탈수기에서 건져 그릇에 담는 일,

오르간 소리가 고요히 내 손끝에서 성당안으로 울려퍼지는 일,

책 속의 한 문장을 발견하는 일,

우연히 들은 음악이 좋아서 샤잠을 켜고 플레이리스트에 담는 일,

오늘도 잠에 들며 등을 긁어달라고 조르는 막내아이의 등을 긁어 주는 일,

그렇게 함께 누워 잠든 아이의 두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고 뽀뽀하는 일,

잠들기 전 매일 써 내려가는 일기에서,

무탈하지 않더라도 무탈하다고 전해오는 안부전화의 음성에서,

안정제와도 같이 묵묵하게 흘러가는 일상들이 담겨있고

그 속에서 평화를 바라는 마음은 넘쳐흐른다.


중요한 것은 무탈함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헤치고, 잘 견디고, 잘 버티는 것. 죽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다. 부박하더라도 엉키고 설켜있을지라도 특별함이 아닌 평범한 일상의 보석들로 삶을 채워 가고, 고쳐 쓰고 다듬어가는 평화 말이다.








스스로에게 건네는 기도이자 위로



https://youtu.be/qp4uAN2NAjs?si=7DTIsBQtnAhPsiUQ


SYML - "Girl (Acoustic)"


주인공 알렉스는 어릴 때부터 엄마를 돌봐야 했다. 주차장에서 잠을 자고, 밖을 떠돌아다니며 일과를 보내는 엄마의 모습을 조용히 뒤쫓아가며 바라보는 알렉스. 그 장면에서 감미롭고 부드럽게 흘렀던 곡, SYML의 Girl (Acoustic)이다.


보호하고 싶은 마음, 함께 아파해주는 공감, 그리고 성장과 치유의 여정을 응원하는 진심이 담겨있다. 답답한 현실이지만 이 음악이 희망과 용기와 사랑을 가득 담아 알렉스에게 기도처럼 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나 자신 스스로에게 건네는 내면의 말이자 하느님이 우리에게 전하는 빛과 용기와 사랑의 말이지 않을까. 그렇게 들려서일까, 퇴근길마다 이 곡을 반복해서 들은 날이 참 많았다.


우리 모두 평범한 일상을 소중하게 대하는 저마다의 풍경을 품고 지켜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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