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라는 섬으로 가는 6월의 뱃노래

임윤찬이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6월

by 윤슬


음악 스트리밍 어플에서 신보 소식을 둘러보다가, 임윤찬의 새 앨범 소식이 눈에 띄었다.

차이코프스키 사계 중 ‘6월: 뱃노래’가 선발매 된 것이다. 사계 앨범은 8월 22일에 발매될 예정이다.


https://youtu.be/V2q95tZuaE0?si=-1ihgr2beSZIrCpp



뱃노래는 언젠가 꼭 글로 써보고 싶었던 주제였다.

작곡가가 누구든, 늘 왜인지 모를 슬픔과 처연함이 따라왔기 때문이다.

뱃사공의 노가 물살을 끌어당기듯 내 마음도 그 정서에 이끌렸달까.

어떤 날은 말을 삼키기 버거운 날이 있었고, 어떤 날은 물방울을 돌에 떨어뜨리듯 침묵을 새기기도 했다.

왜 그토록 뱃노래에 마음이 젖어드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이번 기회에 여러 작곡가들의 뱃노래를 다시 들었다.

쇼팽, 오펜바흐, 슈베르트, 멘델스존, 포레, 라흐마니노프… 그리고 그중 지금 깊이 다가온 것은 단연코 차이코프스키의 6월 뱃노래였다.


곡정보

작곡가: 표트르 일리치 차이콥스키 (Pyotr Ilyich Tchaikovsky)

곡명: 6월 - 뱃노래 바카롤레 (June – Barcarolle)

작품집: 『사계』(The Seasons, Op. 37a)

작곡 연도: 1876년


이 곡은 차이코프스키가 음악잡지 누벨리스트(Nouvellist)에 1년간 매달 발표했던 피아노 소품집 사계 중 하나다. 그중 6월 ‘바카롤레(Barcarolle)’ 즉 뱃노래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곤돌라 뱃사공들이 부르던 전통적인 민요에서 유래한 장르를 말한다. 형식적으로는 주로 6/8박자, 12/8박자의 파도 같은 흔들림으로, 물 위의 리듬을 그려낸다.


나는 이어서 여러 피아니스트들의 연주를 들었다. 블라드미르 아슈케나지, 니콜라이 루간스키, 파질 세이, 브루스 리우 등, 그중 니콜라이 루간스키의 연주는 문장처럼 유려하고 단정한 프레이즈를 잇는 부드러운 서사가 귀를 감쌌다.

하지만 임윤찬의 연주는 기존의 연주들과 또 다른 감정의 결이 있었다.


art work 최호연 - 꽃잎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임윤찬만의 ‘노 저음’이 있었다.

오직 그때, 그만이 저을 수 있는 리듬이었다.

지나치게 침잠하지 않으면서도 슬픔을 생명력 있게 이끌어낸다. 다른 연주들보다 확실히 살아 있었다. 잿빛으로 가라앉지 않고, 형형색색의 감정이 미묘하게 파편처럼 빛나는 느낌이었다.


비눗방울 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작은 무지갯빛이 움트다 이내 터져버리곤 한다. 큰 하나의 방울 안의 또 다른 작은 방울들이 하나하나 모두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어느 색 하나 섞여버리거나 꺼지지 않고 각자 빛났다. 파랑, 분홍, 회색, 노랑, 초록, 보라, 그리고 하양. 그 색들은 임윤찬의 손끝에서 피어났고, 아스라이 반짝이며 물 위에 잠시 머물렀다.


피아노 선율이 이끄는 하나의 프레이즈는 하나의 문단과 문장처럼 끊이지 않고 하나의 숨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임윤찬은 그 안의 단어 하나하나까지 살아 숨 쉬는 프레이즈를 만든다.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큰 방울 안에 또 하나의 방울을 만들어냈다. 젊음의 생동감이라고만 말하기엔 너무 모자랐다.



이 곡의 악보 첫머리에는 알렉세이 플레셰예프(Aleksey N. Pleshcheyev)의 시가 에피그래프로 적혀있다.





Выйдем на берег, там волны

Ноги нам будут лобзать,

Звезды с таинственной грустью

Будут над нами сиять.


Let us go to the shore;

there the waves will kiss our feet.

With mysterious sadness

the stars will shine down on us.


그곳에서 파도가 우리의 발을 어루만지리

신비로운 슬픔과 함께

별들이 우리 위로 빛나리라


Youtube Classic FM



시를 즐겨 읽는 임윤찬은 그가 직접 쓴 라이너 노트(앨범 해설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차이콥스키의 '사계'는 인생의 마지막 한 해를 담고 있다. 울면서 잠들고 잊고 있었던 추억에 빠지고 과거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계속 주저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다시는 오지 않을 오늘을 종소리와 함께 정리한다"


" 열두 곡 중 여섯 번째 곡은 「사계」의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음악은 마치 무언가가 내면 깊숙이 끓어오르는 듯한 감정으로 시작되며, 이는 마치 러시아의 위대한 오페라 가수 샬랴핀의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한 여인이 바닷가에 서 있다. 삶을 마감하려는 듯, 그녀의 시선은 밤하늘 가득한 별들 위에 고정되어 있다.

한때 꿈꾸었던 삶, 간절히 바라던 것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눈에서는 조용히 눈물이 흐른다.

모든 것이 끝나려는 찰나, 천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촛불을 들고 그녀 곁에 모인다. 그들은 하나 되어 노래하며, 그녀의 상처 입은 마음을 감싸 안는다.

그러나 그 따뜻한 위로는 오래가지 않는다. 천사들은 곧 사라지고, 여인은 다시 혼자가 된다. 그녀는 흐느끼며 무너진다.

부드러운 파도가 그녀의 발끝을 어루만지듯 다가와 위로를 건네지만, 그녀는 결국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








6월의 뱃노래는 단지 따스하고 평화로운 여름밤의 낭만을 넘어선다. 그 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듣는 이의 감정을 천천히 끌고 들어간다. 플레셰에프의 시가 있는 해변, 그 파도가 데려다준 섬에는 애잔하고 멜랑콜리한 정서가 감돈다.

그리하여, 김승희 시인의 시 한 편이 화답처럼 떠올랐다.


가장 낮은 곳에

젖은 낙엽보다 더 낮은 곳에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그래도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도 사랑의 불을 꺼트리지 않고 사는 사람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그래도,

(...)

그래도라는 섬에서

그래도 부둥켜안고

그래도 손만 놓지 않는다면

언젠가 강을 다 건너 빛의 뗏목에 올라서리라,

어디엔가 걱정 근심 다 내려놓은 평화로운

그래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으리라


- 김승희, 그래도라는 섬이 있다 <희망이 외롭다>




임윤찬의 음악을 들으며 그 섬에 잠시 정박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리셰예프의 별빛과 김승희의 그래도가 공명하는 그곳에 마음을 눕혀두고 싶은 것이었다.


신보가 발매되던 날, 난 꿈을 꾸었다.

마음을 나누는 벗과 함께 손을 잡고 어떤 요람 속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어느 엄마와 아기 둘이 있었다. 부드럽고 아늑한 빛이 요람 안을 비추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거기엔 존재가 증명처럼 느껴지는 연결감이 있었고, 따뜻한 슬픔과 선한 마음이 있었다.


아마도 지친 마음이 스스로 회복할 안전지대를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해와 조용한 연대, 치유에 가까운 그리움, 감정의 안전망. 아마도 나는 꿈에서 그래도라는 섬에 닿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 같다. 힘내서 노를 젓지 않아도 닿는 평안한 섬으로.


하지만 현실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붙잡고 바라보는 일은 때로 외로운 고문으로 다가온다.

누구에게나 그런 밤이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멀고 막연한 기대를 붙들다 오히려 더 깊이 잠기는 순간들 말이다. 장건한 희망은 뜻하지 않게 허무로 기울어져 빛이 바래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무른 희망을 툭 내려놓는 솔직함을 붙잡고 싶어진다.


늘 어렵지만, 이제는 그 섬이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노를 젓는 내가 누구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걸 아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정연하게 내려놓고, 침묵을 견디며 노를 저어 간다. 그렇게 나아갈 때, 언젠가 내가 주체적으로 그린 단단한 희망에 닿을 수 있을지 않을까. ‘그래도’라는 섬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짜 배를 띄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닿을 수 있는 가능성은 물 위에 머무는 나, 내가 저어 가는 리듬과 항해에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지금, 내 안의 물 위에서 6월의 뱃노래를 들으며 천천히 노를 젓고 있다.

노를 저어도 제자리에서 표류하는 기분이 든다 하더라도

그래도라는 말 안에 적잖이 남아 있는 의지와 온기를 희망으로 껴안은 채,

그래도라는 섬을 품으며 지난다.

내 안의 깊은 곳, 진심으로 닿는 무한한 풍경의 섬을 향해.

그곳이, 진정한 그래島임을.








https://youtu.be/dab0CSg7G0M?si=W9YI4yPWX_iTBJnq

Classic FM 에서 공개한 연주영상

악보(출처:imslp)

참고

https://www.classicalconnect.com/music/6915?utm

https://www.hyperion-records.co.uk/dc.asp?dc=D_4871021


『 슬프고 아름다운 비터스위트 』 22편 - '그래도라는 섬으로 가는 6월의 뱃노래 - 임윤찬이 연주한 차이코프스키의 사계 중 6월' 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 나눕니다. 그저 알고 싶고, 깊게 느껴지는 것을 ‘왜?’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저만의 시선으로 편하게 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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