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몬 비타민, 알리스 사라 오트를 만나다

존필드 녹턴 9번과 베토벤

by 윤슬

레몬 비타민, 알리스 사라 오트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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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신영체임버홀에서 열린 알리스 사라 오트의 내한 공연을 관람했다.

공연장은 회사 근처였고, 소규모 공연장이라면 가까이서 그녀를 마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며칠을 망설이다가 결국 시간을 만들었다. 바쁜 회사일정과 사정상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어렵게 만들어낸 드문 여백, 정말 오랜만의 공연이었다.


미리 프로그램을 살펴보거나 앨범을 들어볼 겨를은 없었다. 그럴 여유조차 없이 7월의 바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좋았다. 아무 준비 없이, 아무 기대 없이, 소진된 몸을 끌고 찾아간 그 자리는 가뭄 끝에 쏟아지는 단비처럼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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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필드, 그리고 베토벤


알리스 사라 오트 연주의 존 필드 녹턴 앨범을 발매 당시 들은 적은 있었지만, 그다지 크게 관심을 두진 못했었다. 그런데 공연의 첫 곡, 존 필드의 녹턴 1번의 첫 음이 흐르는 순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채 한 마디도 지나기 전에 벌써 눈가가 뜨거워졌다. 누군가의 연주를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듣는 것이 대체 얼마만이었을까. 공연이 내게 얼마나 큰 기쁨이었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알리스 사라 오트는 팬데믹 시기, 조금 우울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녹턴 야상곡들을 플레이리스트에 모아서 듣고 있던 중에, 존필드의 녹턴을 발견했다고 털어놨다.

그녀의 앨범으로 처음 접한 존 필드의 음악을, 이 공연을 통해 온몸으로 체감했다.


녹턴의 창시자인 존필드는 19세기 초에 활동한 아일랜드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입니다.

특히 오늘날 피아노 음악의 한 장르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야상곡’인 녹턴을 처음 창작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유럽 전역, 그중 러시아 제국에서 활발히 활동한 필드에게 '야상곡'은 시적이면서도 직관적인 그의 연주 스타일을 표현하는 완벽한 수단이었습니다.

ㅡ 애플뮤직 앨범소개 중에서


사라오트.png 출처 - 신영체임버홀 인스타그램



사라 오트는 존 필드의 녹턴 1번, 2번, 4번을 연달아 연주했다. 구름 위를 부드럽게 맨발로 걷는 느낌. 모차르트의 밝은 창가에서 편안하게 스며드는 빛처럼 따스했지만, 동시에 달빛 아래서 느끼는 쓸쓸함도 깃들어 있었다. 분명히 슬픔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젖어 있는 감정이 아니라, 시간을 품고 난 뒤에야 말할 수 있는 슬픔이었다. 슬펐다고, 하지만 진실이었노라고. 처음과 같이, 이제도, 내일도, 언제까지나 아름답게 회상하며 노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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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커튼콜 시간 중 찰칵, 우- 신영체임버홀 인스타그램


그녀만의 세계로 침투하여 연주에 몰입한 뒤, 연주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는 환한 미소로 관객과 마주했다. 정말 이쁘고 싱그러운 레몬 비타민 같았다.

이어진 30분 남짓의 인터뷰와 질의응답 시간. 관객들과 소통하며 나누는 것을 즐기는 그녀는 이지영 음악평론가와 장택수 통역가와 함께한 그 시간 동안 그녀는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무엇(What)을, 왜(Why), 어떻게(How) 연주할지 늘 고민한다고 했다. 프로그램도 직접 구성하고, 곡에 대한 해석 역시 스스로의 언어로 풀어낸다. 규정된 틀에 갇히지 않는, 스스로의 방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아가는 예술가였다.

여러 이야기가 오갔다. 여기에 다 담을 수는 없지만, 그녀는 음악에 진실되고 본인이 생각하고 표현하고 싶은 세계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독창적인 해석과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건 어쩌면 자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야상곡과 월광, 죽음을 이야기하다


이어진 곡은 존 필드 녹턴 9번과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 ‘월광’. 이 두 곡을 나란히 연주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이 두 개의 작품을 연달아 설명하고 피아노 앞에 앉아 비교하며 연주해 주었다.

두 곡의 공통점은 느린 템포, 반복되는 셋잇단음, 서정적이면서도 어두운 분위기. 이 공통점을 직접 피아노로 연주하며 들려주었다.


특히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4번은 ‘월광(Moonlight)’이라고 불리지만, 사실 베토벤이 붙인 부제는 아니며, 낭만적인 달빛과는 상관이 없다고 했다. 이 곡은 베토벤이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중 돈 조반니가 코멘다토레를 죽이는 장면에서 영감을 받아 작곡했다고 설명했다. 즉, 이 곡은 달이 아니라 ‘죽음’을 응시한 장송곡이라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어릴 적부터 달빛 풍경 속 어느 이야기를 상상하며 연주하던 내 기억이 완전히 뒤집히는 듯했다. 하지만 곧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사라 오트의 연주는 확신에 찬 시선으로 그 곡의 어둠을 가리켰고, 나는 그 어둠 속에 들어가야만 했다.



https://youtu.be/nxP_w_kEJ28?si=xpSO0c5YP-5nn40a


Alice Sara Ott - John Field: Nocturne No. 9 in E Minor, H. 46 (Official Music Video)


존필드의 녹턴 9번에 대해 그녀는 “왼손은 부드럽게, 오른손은 우는 것처럼 연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건 마치 과거진행형처럼 애잔함을 말하는 것 같았다.

베토벤이 실제로 돈조반니에서 영감 받은 그 감정을 떠올려보며 이 두 곡을 감상했다.

이젠 달라진 감성으로 접근하니 더 곡에 집중이 잘 되었고, 비로소 14번 소나타가 내 안에서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 들었다.



https://youtu.be/kymitiTceLY?si=hTuk0ogXEkRRhZr6


Alice Sara Ott - Beethoven: Piano Sonata No. 14 in C-Sharp Minor, Op. 27 No. 2 "Moonlight": I. Adagio sostenuto




https://youtu.be/z6HR5qNya24?si=o34R26YkKh05tbny


Alice Sara Ott - Beethoven: Piano Sonata No. 14 in C-Sharp Minor, Op. 27 No. 2 "Moonlight": III. Presto agitato




베토벤 소나타 14번의 마지막 3악장.

나는 월광 소나타의 이런 연주를 처음 들어봤다.

선율은 쫓고 쫓기듯 위로 치솟고, 제일 높은음에서 두 번 강하게 내리치는 타건. 그 순간마다 그녀는 자신이 낼 수 있는 포르테와 격렬함을 응축적으로 모아서 스타카토로 두드렸다.

처음 그 부분에서 객석의 놀란 관객분의 몸이 움찔하는 모습도 보였다.

신영체임버홀처럼 연주자와 객석 사이가 가까운 공간에서는 그 울림이 더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었고, 숨소리와 페달 소리, 손톱이 건반에 닿는 소리까지 들렸다.


곡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 안에서 광활한 폭포수가 터진 듯 빠르고 강하게 포효했다. 마지막 음을 강하게 내리치는 순간, 그녀의 왼쪽 귀걸이가 떨어져 페달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그만큼 절실하고, 뜨거운 연주였다. 이어진 앙코르곡, 아르보 패르트의 Fur Alina도 참 좋았다.






집에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간단히 소감을 메모장에 써 내려갔다. 그러면서 베토벤이 영감을 받은 장면은 파울 챌란의 시를 떠올리게 했다.



네가 내 안에서 소멸하는 것처럼:


마지막

다 해진

숨의 매듭에도

너는 꽂는다

파편 하나를

삶을.


- 파울 챌란, <네가 내 안에서>




형광 연둣빛 원피스를 입고 나타난 그녀는, 싱그럽고 사랑스러운, 톡 쏘는 레몬 비타민 같았다.

자신만의 해석으로 연주하고, 구름 위를 걷듯 손끝을 날리며, 규범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맨발의 영혼.

그러면서도 피아노를 부수듯 몰입하며, 음악으로 저승을 뒤흔들었던 오르페우스를 떠올리게 하는 매혹적인 피아니스트였다.

나를 살게 하는 건 결국 이런 순간들이란 걸, 다시금 깨달으며 맞이한 고마운 밤이었다.

이토록 또렷한 기쁨 하나가 내 삶을 다시 이어주고 있었다.




『 슬프고 아름다운 비터스위트 』 23편 - '레몬 비타민, 알리스 사라 오트를 만나다-존필드 녹턴 9번과 베토벤' 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 나눕니다. 그저 알고 싶고, 깊게 느껴지는 것을 ‘왜?’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저만의 시선으로 편하게 담아봅니다.




함께 읽어보면 좋을 공연 후기 링크를 남깁니다.


https://blog.naver.com/jay1887/223928352736

https://blog.naver.com/hindro/223929197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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