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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26. 2023

상실과 죽음에 마땅히 애도하다. 애가(哀歌) 감상문1편

원하지 않는 삶으로 가는 환생을 향해, 이태원참사 1주기를 애도하며.


죽음은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다. 

하루하루 살아있는 지금 이 순간이 기적이란 걸 알아도 

늘 영원히 살 것처럼 안일하게 살기도 하고, 

상심이 소멸하며 꺼진 맘으로 겨우겨우 하루를 흘려보내기도 한다.


죽음의 상실은 부지불식간에 찾아온다. 

그렇게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충격이 오고, 삶과 죽음과의 관계를 직시하게 된다. 특히나 내 삶의 근원인 부모, 내 목숨과 맞바꾸어 살리고 싶은 자식,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겪은 마음은 감히 상상할 수 조차 없다.  


인간에게 생명의 탄생과 죽음만큼 경계가 확실한 것이 있을까? 

죽음만큼 커다란 절대상실은 없다. 

그렇기에 죽음을 달래는 인간의 심성은 가장 순수할 것이다.

슬퍼하는 그들에게 이제 그만 슬퍼하라고 할 수 없다.

애도하는 자를 비난하거나 애도하지 말라는 사람에게는 삶의 가치가 무어냐고 되물어야 한다. 


철학자 김동규는 이렇게 말한다. 

" 상실의 슬픔은 거부할 수 없다. 사랑의 크기에 비례한다.

사라지는 누군가를 보낼 수 있는 슬픔. 슬픔을 통해 슬픔을 이겨내야 한다. 그러려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 뒤돌아보지 않음으로써 짓무르고 곪아 터질 때까지, 그 상처에서 새살이 돋아날 때까지, 상처의 아문 흔적이 빛날 때까지. 애도의 정점은 더 이상 붙잡으려 하지 않고 떠나감을, 상실을 긍정하는 것이다. "



애가(哀歌, Lamentation) 

여기, 그 추모의 향연에 슬픈 노래가 울려 퍼지고 있다.

여기, 애도의 정점을 불태우며 진실로 상실을 받아들이는 노래의 여정이 시작된다.

비로소, 상실과 죽음이 진실로 온전해지는 순간.

비로소, 예술이 눈물의 꽃으로 피는 순간이다.



지난 8월 말, 시를 기반으로 합창을 작곡하시는 전지은 작곡가님께서 영상 하나를 보내주셨다. 

첫 화면에 보이는 곡설명을 보자마자, 심장 한 켠이 멎은 듯했다. 



수면제를 먹이고도 실패하여 울 수밖에 없었던 아기들을 생각하니 한없이 먹먹해졌다. 하물며 아기를 바다에 놓아야 했던 부모의 마음은 대체...

3번의 시도 끝에 무사히 바다를 건널 수 있었던, 그 배안의 두 살짜리 아기였던, 박영근 작곡가님께서 평생 맘속에 이고 지고 살았어야 할 그 무게는 또 얼마나 무거웠을까.  서해바다에 아기를 수장시킨 엄마의 노래인 <6인의 연주자를 위한 애가>를 쓰시고선 마음을 기꺼이 덜어내셨을까? 



https://youtu.be/HmWA_M7y0Zo?si=hYK3RVlzsXEGPpYO


• 제목 : 애가(哀歌 , Lamentation) (2021)

• 작사 : 박영근 (1947- 2016) <6인의 연주자를 위한 애가>

• 작곡 : 조혜영 (1969- )


•  2022.10.11.TUE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  Seoul Arts Center 

•  지휘 : 김종현 예술감독

•  합창 : 인천시립합창단

•. 오케스트라 : 라퓨즈 플레이어즈 그룹



2016년, 박영근 작곡가님은 그 어린 영혼들이 있는 품으로 돌아가셨고, 제자 조혜영 작곡가님이 합창곡으로 새롭게 작곡하여 2021년 이 곡을 그분에게 헌정하였다. 


故 박영근 작곡가님은 평생 어린 영혼들을 위해 많은 작품들을 쓰셨다고 한다. 그래도 충분히 덜어내지지 않았을, 못했을 슬픔이었으리라. 아니다, 난 경험하지 못했기에 손끝에 파고든 가시만큼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귀와 마음을 열어 공감하려 노력할 뿐이다. 흐르는 선율이 너무 비통하고도 아름다워서 가슴이 아려왔다.  


지난봄, 박물관에서 보았던 하나의 그림이 떠올랐다.


< 정재철, The Korean War No.1 (2012) >

아이들 표정에 담긴 분단의 아픔과 현실이 이보다 더 진실할 수 없었다. 맘이 시큰해졌다. 뭐 좀 먹었느냐고, 엄마 아빠는 어딨느냐고 침묵으로 물어야 했다. 



이 소녀와 등에 업힌 아가의 눈빛에 이끌려 한창 서서 바라보았다.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를 불안과 공포가 서린 설움이 소녀의 눈빛에 드리워져 있었다. 쓸쓸한 체념도 함께 말이다.  등에 업힌 아가는 누나를 향한 완전한 사랑의 믿음이 있으며, 순진무구한 편안함이 안온하게 다가온다. 허나, 누나의 겁이 등뒤로 조금은 스민듯하다. 전쟁 속이지만, 이 날은 온전히 별 탈 없던 평온한 날이지 않았을까?  


전쟁 중임을 알 수 있는 탱크가 보이는 뒷배경은 노랑, 주황만으로 따뜻하고 단순하게 표현되었다. 반면 아이들의 얼굴엔 다채로운 빛깔들이 드리워져있다. 그래서일까? 색채의 명암과 수적인 극명한 대비가 이 그림에 담긴 정서를 말해주고 있었다. 



애가의 근원, <6인의 연주자를 위한 애가>가 궁금해졌다. 인터넷으로는 자료를 찾을 수가 없어서, 故 박영근 작곡가님이 오랜 기간 교단에 서셨던 한양대학교 작곡과에 연락하여 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문의했다. 하지만 결론은 알 수가 없었다. 현재 한양대 음대 자료실에는 없고 개인소장으로 되어 있다면 일반인이 감상할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래서 이 노래를 들으며 한 줄 한 줄 가사를 옮겨 적었다. 


이내 곧 존버거가 < 우리가 아는 모든 언어> 중 ‘노래에 관한 몇 개의 노트’에서  말한 것이 떠올랐다.

" 노래는 현재를 채우는 동시에 미래의 어딘가에 있는 청자의 귀에 닿기를 희망한다. 이런 끈질긴 희망이 없다면 노래는 존재할 수 없는 거라 믿는다. 노래는 앞으로 다가간다. 노래는 어떤 일의 여파나 돌아옴에 대해, 누군가를 맞이하는 일과 작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노래는 어떤 부재 앞에서 불려진다. 부재가 노래에 영감을 주고, 그 부재에 대해 노래는 이야기한다. 동시에 노래를 공유하면서 그 부재도 공유되고, 덕분에 그것은 덜 아프고 덜 외롭고 덜 고요한 것이 된다.  


노래를 공유하는 동안, 혹은 그렇게 노래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원래의 부재는 ‘줄어들고’, 그건 뭔가 승리와 비슷한 경험이 된다. 종종 차분한 승리이고, 또 가끔은 잘 드러나지 않는 승리다. "



바다에 수장된 어린 아가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마땅히 슬퍼하는 이 순간이,

그 죽음을 평생 자신의 마음의 빚으로 안고 살아간 이들의 서글픈 한탄이,

애도의 정점을 울린다. 









이 곡은 총 3악장으로 구성된 합창곡이다.



I. 자장자장 우리 아가

아이를 품 안에 안고 간절히 재우는 듯하다. 엄마품에 안겨 재워주는 마지막 자장가였을까. 

악기 없이 사람의 목소리만으로, Ebm조성의 단조 화음이 유려하고 나직하게 천천히 반복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우리애기 잘도 잔다

자장 자장

새는 새는 나무에 자고

자장 자장

쥐는 쥐는 구멍에 자고

자장 자장

우리 같은 애기들은

엄마 품에 잠을 잔다

자장 자장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엄마 품에 잠들어라

고이고이 잠든 아가 깨어나지 말아라


자장 자장 우리 아가 엄마 품에 잠들어라

고이고이 잠든 아가 깨어나지 말아라


우리 애기 잘도 잔다

자장 자장 자장




II. 검은 파도에 너를 보내며

피아노와 현악기는 비탄에 젖어 비극의 끝을 향해 격렬하게 달린다.  이내 노래가 시작되자 현악기는 서정적으로 돌변하며 노래와 함께 슬픔으로 따뜻이 감싸 안는다.

내 목숨을 바쳐서라도 구하고 싶은 생명을 향해 엄마는 절규한다. 슬픔을 슬픔으로 직면하며 감싸안는 악장이다. 



내가 죽어 너를 구할 수 있다면

저 거친 파도도 두렵지 않건만

네가 죽어 우리를 살려야 한다니

이 가혹한 운명이여


내가

네가


내가 죽어 너를 구할 수 있다면

저 거친 파도도 두렵지 않건만

네가 죽어 우리를 살려야 한다니

내가 죽어 너를 구할 수 있다면


칠흑같이 어두운 밤

검은 파도에 너를 보내며

숨죽여 통곡하노라



이 악장을 들으며 유독 세월호로 희생된 죽음과 유가족들이 생각났다. 

그 사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진실 앞에서 무너진 가족들.

그들이 충분히 슬퍼하고 진정으로 떠나보내지 못하고 있는 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밝혀지지 않은 진실 때문이다. 답은 없고, 오갈데없이 길을 잃은 억울함이 꽉 들어찼다. 그저 우린 이 고통의 모순 앞에서 잊지 않음으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해 김연수 작가는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에서 이렇게 말한다. 


“ 세월이 약이라는 말속의 ‘세월’이란 이 준엄한 진실을 받아들이는, 일련의 지극히 고통스럽고 잔인한 시간을 일컫는다. 그건 원하지 않는 삶으로의 환생 같은 것이라,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남은 이들의 여생을 이룰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유가족들이 쇼크, 분노, 회상과 우울증, 용서와 수용, 재출발의 단계를 밟는다는 것은 그간의 대형 참사 유가족에 대한 연구 결과로 밝혀졌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용서와 수용, 재출발의 단계로 나아가는 게 마땅하다. “


원하지 않는 삶으로의 환생 같은 것이라니. 얼마나 잔인한 시간을 버티고 있는 걸까. 

2악장을 들으며, 세월호와 이태원참사로 오갈 데 없는 유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키리에>라는 곡이 떠올랐다. 김윤아는 상실을 슬픔으로 직면하며 있는 그대로 노래한다. 

https://youtu.be/xMVOJDVGkJo

김윤아 - 키리에 



Kyrie eleison 키리에 엘레이손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의 기도말이다. 미사가 시작되면 죄를 고하고 저의 큰 탓임을 고백한 후 예수님께 치유해 주실 것을 부탁드리는 탄원이다. 


키리에의 가사를 보면, 상실의 슬픔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절망하고 있다. 첫마디마다 울리는 리듬은,  자식을 바닷속에 수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부모가 주먹으로 자기의 피 흘리는 가슴을 통렬하게 내리치는 소리로 들린다. 이 곡을 들으며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나의 고통뿐만 아니라, 타인의 고통에도 한 발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쉴 새 없이 가슴을 내리치는 이 고통은

어째서 나를 죽일 수 없나

가슴 안에 가득 찬 너의 기억이, 흔적이

나를 태우네 나를 불태우네


울어도 울어도 니가 돌아올 수 없다면

이건 꿈이야, 이건 꿈이야, 꿈이야

불러도 불러도 너는 돌아올 수가 없네

나는 지옥에, 나는 지옥에 있나 봐


차라리 지금 이대로 눈을 감고

다시는 깨어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걸 알았더라면, 내 손으로 내 아기를 바닷속에 던져야 할 수밖에 없다면 

배를 타기 전의 삶이 전쟁통이라도, 내 손으로 내 자식을 수장시킬지도 모를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현실을 벗어날 용기와 강인함은 내겐 없다. 전쟁으로 죽을지 몰라도 함께 하는 삶이 천국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럼에도 희망을 찾기 위해 뱃길에 올랐는데, 이도저도 방법이 통하지가 않아서 한 배에 탄 다른 수많은 생명들을 살리기 위해 수장시켜야 했다면, 난 내 아이를 내 품에 안고 같이 뛰어내렸을 것이다. 자식을 잃고, 가슴에 묻어야 하는 삶은 내게 절대 희망이 될 수 없다. 그래서 유가족의 마음과 슬픔에 위로를 건네도 손끝에 파고든 가시만큼도 감히 그 고통에 공감하긴 힘들 것이다. 단지 위로를 전하고 싶은 깊은 마음만 진실일 뿐이다.

월남하며 희망을 찾아가는 이들은 그 모든 것들을 뛰어넘을 삶의 강인한 자세를 지녔으리라. 

지옥을 보다 천국답게 만드는 의지와 노력은 남은 사람의 몫이다. 

영화 <인생은 아름다워>를 보라. 삶의 끝으로 가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에게 보이는 힘찬 발걸음을. 웃을만해서 웃는 게 아니라, 그냥 웃어버리는 힘 말이다.





III. 편히 쉬어라 천국에서


현악기가 서정적으로 감싸 안으며 시작한다. 이런 선율이 품어주는 그곳이 있다면 달려가서 편히 뉘이고 싶어졌다.  불쌍한 영혼들이 마땅히 가야 할 천국의 요람이 있다면 그곳일 것이다.

이 곡에서 내가 제일 아름답다고 느껴진 부분은 ‘기쁨이 넘치는 그곳~ 에서’였다.

3도 화음이 1전위하며 9음으로 울려 퍼지며 느려지면서 잠시 멈추는 순간이다.



편히 쉬어라 천국에서

편히 쉬어라 천국에서

슬픔과 눈물이 없고

기쁨이 넘치는 그곳에서


질투와 시기가 없고

사랑이 넘치는 그곳에서

전쟁과 분단이 없고

평화가 넘치는 그곳에서

기쁨과 사랑과 평화

편히 쉬어라 천국에서


자장 자장 자는구나

우리애기 잘도 잔다

엄마 품에 폭 안겨서

칭얼칭얼 잠 노래를

그쳤다가 또 하면서

쌔근쌔근 잘도 잔다




슬퍼함을 피하지 않고 온전히 슬퍼할 수 있다면 감히 축복이라 말하고 싶다. 

억지로 누르고 감추고 부정하면, 그 슬픔은 길고 가늘게 늘어져서 남은 여생의 어느 때에 부지불식간에 다른 틈을 비집고 들어가 마음과 몸에 습격을 가할지 모른다.  오랫동안 헤맬지라도, 그 순간, 그것을 온전히 품고 통과하고 겪어내며 마주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난을 겪을 때조차도, ‘이래야 한다’면서 그에 비해 단단하지 못한, 준비되지 않아 안 그래도 힘든 자신을 더욱 채근한다. 고통받을 때조차도 나약한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저마다 단 한 번의 삶을 살고, 경험치가 다르고, 역치가 다르기 때문에 절대 고난도 없고, 고통의 절대경중이랄 것도 없다. 남의 고통을 내 위로로 가져오지 말아야 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스스로가 받아주면 된다. 그저 나약하고, 못난 나를. 그렇게 불완전한 인간적인 나를 말이다. 그걸 알면 내가 보이고 못난 내 경계와 위치가 보이면서 깨우치고, 조금이라도 성찰하며 변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그것이 바로 신이 우리를 가르치는 방식이다. 어둠으로 빛을 인도하고, 기쁨을 주기 위해 고통을, 상실을 통해 사랑의 더 큰 기쁨을 알려주심을 말이다. 


조혜영 작곡가님의 선율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고도 슬프게 적시는 감성을 동시에 안겨준다. 엔니오 모리꼬네처럼 말이다. 이 가사와 선율이 유가족들을 따뜻하게 안아 위로해 주었으면 좋겠다. 3악장 제목처럼 천국에서 편히 쉬라고 진실로 애도하며 말할 수 있는 순간이 유가족들에게 하루빨리 오기를 기도드린다. 




ⓒ imagetoday





『 수요일의 슬픈 Bittersweet 』 12편 - 상실과 죽음에 마땅히 애도하다 1편 - 애가(哀歌) 였습니다.
이태원 참사 1주기인 10월29일에 맞춰 애가(哀歌) 감상문 마지막편인 2편이 발행될 예정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 나눕니다. 
그저 알고 싶고, 깊게 느껴지는 것을  ‘왜?’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저만의 시선으로 편하게 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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