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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29. 2023

상실과 죽음에 마땅히 애도하다. 애가(哀歌) 감상문2편

원하지 않는 삶으로 가는 환생을 향해, 이태원참사 1주기를 애도하며.


https://brunch.co.kr/@minachoi/57



https://youtu.be/HmWA_M7y0Zo?si=R1PSeS_rk5tu2QzM&t=831

먹먹한 마음에 듣기 망설여지신다면, 3악장을 꼭 들어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죽음에 대한 단상 1.


지난여름, 사랑하는 작은 이모가 돌아가셨다. 그 날은 내 생일이었다.

입관식에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보았다.

눈으로 보이기 때문에 믿고 싶지 않아도, 믿을 수밖에 없는 죽음의 현실.


이승에 남은 자들의 회한과 슬픔을 담은 말들이 곡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다.

영생불멸의 대화를 나누는 그 마지막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감사함.

미안함.

용서를 바라는 고해.

사랑함.

생의 안에서 나누면 더 벅찼을 말들이 눈물 속에 안타깝게 메아리친다.

하염없이 젖고 젖은 내 얼굴을 숙여 떨리는 손길에 사랑과 고마움의 온기를 담고, 귓가엔 미안함과 사랑의 말을 전해드렸다. 


이 모든 감정들이 울음 속의 음성으로 공명하는 시간은

저승으로 가는 망자의 넋을 기리고

이승에 남는 자들에겐 스스로를 위로한다.

그랬으리라, 그럴 거라, 반드시 그래야 된다고 굳건히 믿는다. 

그래야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 저승으로 미련 없이 갈 수 있고, 

이승에 남겨질 사람들은 다른 환생의 시간들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생의 너머로 가는 관의 문이 닫혀도 믿기지 않았다.

생명이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것이 3일 남짓이라는 것 또한 믿기지 않는다. 

저승의 문 앞에 있던 철퇴가 관을 내려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승으로 잘 데려갈 테니, 남은 자는 남은 생을 잘 살아가라고.



이모와 함께 있으면 노스탤지어로 향하는 애수의 마음이 늘 평안하게 스르륵 녹아내렸다.

방학 때 이모네 집에서 지내다 속상한 일이 생길 때면, 말없이 내 손을 끌고 사촌오빠 방안의 피아노 앞으로 데리고 가셨던 이모셨다. 

갑작스럽게 하늘로 가신 이모는 발인 일주일 후 내 꿈에 나타나셨다. 내 인사엔 대답이 없으셨지만, 늘 그러셨던 것처럼 안온하게 따뜻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없이 하늘을 쳐다보고 계셨다. 




죽음에 대한 단상 2.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가로지르면 따뜻하다.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평안한 휴식을 안겨준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북한산의 기개에 찬 능선과 저 멀리 목멱산까지. 산맥이 품고 있는 도심의 빌딩숲과 그 아래 흐르는 강물, 그리고 유람선과 오리배들을 눈에 담으며 한강의 가로선을 따라 달리고 달린다. 땀 흘리며 조깅을 하는 사람, 내 뒤에서 옆으로 따르릉 하며 인사하고 앞질러가는 라이더의 뒷모습을 보면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건강한 마음들이 흘러넘쳐 선한 생동감을 안겨준다.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늘빛깔을 담은 물빛을 바라볼 때 행복하다. 서울도심의 밤조명을 품은 물빛도 아름답다. 페달을 힘차게 밟으면 밟는 대로, 속도를 줄이면 줄인대로 내 시선의 속도에 따라 함께 노니는 윤슬, 그 빛을 따라가며 한강변 바람을 가르면 즐겁다.  

이렇게 모두 하나로 어우러진 따뜻한 풍경은 맘과 몸의 번민을 쫓아내는 선함으로 들어찬다.


한강물을 세로 지르다.


발인 며칠 뒤, 자전거를 타고 처음으로 한강을 세로 질러보았다. 쌩쌩 옆을 달리는 자동차들, 가로등은 하나씩 천천히 내 옆을 지나간다. SOS전화는 혹시 모를 누군가의 맘에 사회안전망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다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이 서로 스칠 때마다 침묵의 시선으로 함께 지키고 있었다. 가슴켠을 훌쩍 넘는 난간의 높이너머 한강대교들의 능선이 켜켜이 쌓여있다. 가로시선에선 결코 느낄 수 없던 다른 광활함. 아, 한강이 이렇게 컸구나. 내가 한없이 작게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자신의 생명을 더욱 돌아보게 만드는 법이라고 했다. 쫓아냈던 번민들이, 침몰한 영혼들의 숨결이 강물 속에서 아득하게 들리는 듯했다. 칠흑같이 검은빛의 일렁임. 무서웠다.



삶은, 인생은 한강을 보는 시선처럼 가로의 따뜻함, 세로의 어둠으로 날실과 씨실로 엮이고 엮이는 신비한 결속으로 인생이라는 천을 직조하는 것일까?

삶이, 삶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 죽음 앞에서 더 간단해진다. 

삶은 굵직한 실로 엮어야 한다는 것을. 내면에서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고요 속에서 귀 기울인다.


그 이후 한 달 하고 보름이 지나고 나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신께서 데려가시는 게 아닌

지금 살아있음이

인간의 가치, 당신의 가치, 나의 가치라고 말이다.

그게 인간의 가치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존재함으로 살아있음으로 이미 완전하고 충분하노라고. 


존재가 어떻게 존재해야 한다는 당위나 이유가 아닌

존재 자체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위로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사랑은 없다. 








길고 길었던 글을 마무리하며


종교학자 정진홍은 말한다. 제사란 죽음 때문에 슬픈, 죽음으로 인한 별리 때문에 가슴 아픈, 죽음으로 인한 단절 때문에 절망을 살 수밖에 없는 회한에 가득 찬 사람에게 주어진 유일한 위안이고 온전한 축복이라고 말이다.


오늘 2023년 10월 29일은 보라색 리본의 물결이 울려 퍼지고 있는 이태원 참사 1주기이다.

아직도 가슴에 비탄을 안고 진정 애도하지 못한 유가족분들에게, 억울하게 생을 달리 한 영혼들에게, 상실에 힘든 이들에게 신의 사랑으로 따뜻하게 품어 채워달라고 매일아침 두 손 모아 묵주기도를 올리고 있다. 


ⓒ ImgSolut, FabrikaPhoto


영혼의 문이 하나가 닫히면 사랑은 다른 모습을 하고 돌아온다는 카프카의 말처럼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보낼 수 있다면, 이루 말할 수 없던 고통만큼 더 커진 사랑의 그릇을 언젠간 확인할 수 있을 거라고 한다. 

신은, 현자는 그건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고 말한다. 내 삶 안에서 날 나답게 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발견하며 스스로 자율의지로 채워야 한다고. 내 삶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바를 스스로 행동으로 채우기를 바라고 있다. 물론 쉽지 않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일상을 더 특별하고 새롭게 발견하는 시선으로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순간순간, 하루하루를 기쁘게 고요하게 채웠으면 좋겠다.


애가(哀歌 , Lamentation)는 내 무의식의 결핍, 슬픔과 상실의 근원에 더 가깝게 다가가게 해 주었다. 내 사유의 한계를 직면했지만 그 또한 지금의 불완전한 모습 그대로 자연스러웠다. 

이제 한 해 한 해 갈수록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을 더 많이 보게 될 것이다. 이 곡에 영감 받아 좌절에 한발, 사랑에 한발 더 넓게 내딛으며 상실과 죽음에 대한 단상을 오랜만에 글과 음악으로 담는 시간 동안 모순적으로 행복했다. 이 zone을 곧 빠져나가겠지만, 이내 빠져나가기 아쉬운 사랑의 늪이다. 조혜영 작곡가님께 감사와 사랑을 전하고 싶다. 



故 박영근 교수님과, 조혜영 작곡가님, 한국전쟁 중 바다에 수장된 모든 아기들, 세월호 속에서 바다에 잠긴 생명들, 이태원 참사로 희생된 생명들, 교단에서 스스로 삶을 마감한 분들, 이 모든 유가족들에게,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으로 인하여 소중한 목숨을 덧없이 잃어가는 생명들, 십수 년 전 뱃속으로만 품었던 언젠가 하늘에서 만날 튼튼이, 가슴으로 품는 상실과, 진심으로 애도하고 애도되어야 할 세상의 모든 죽음에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올린다.


상실에 슬퍼하는 이들이 마음껏 슬퍼하고 울며 노래하고 절규하여 

슬픔을 마땅히 애도하는 시간과 자유와 권리가 진실하게 울려 퍼지기를.

그리하여 기어코 생의 따뜻하고 경쾌한 한 발을, 환생의 한걸음을 내딛을 수 있기를.




“ 이 세상에서 어린 생명이 더 이상 전쟁과 사고로 희생되지 않기를,

자식을 먼저 보낸 모든 부모들에게 하늘의 위로가 함께 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ㅡ 조혜영






https://youtu.be/jiLo6Tmgh8w?si=HDejTJPGgBD8YJTC




『 수요일의 슬픈 Bittersweet 』13편 - 상실과 죽음에 마땅히 애도하다 - 애가(哀歌) 감상문 2편이었습니다.

매주 수요일 찾아뵈었던『 수요일의 슬픈 Bittersweet 』을 『 슬프고 아름다운 Bittersweet 』으로 변경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음악에 대해 나눕니다.
그저 알고 싶고, 깊게 느껴지는 것을  ‘왜?’라고 스스로에게 물으며 저만의 시선으로 편하게 담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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