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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an 01. 2024

박수근의 사랑

흙처럼 살다 간 아름다운 바위



밀레를 통해 그림에 대한 사랑을 키우고 독학으로 우직하게 자신만의 화풍을 확립한 화가 박수근. 그분의 인생 속 만개한 꽃처럼 화사했던 김복순 여사님과의 사랑이야기가 글과 음악, 그림과 연기로 어우러져 공연예술로 아름답게 피어났습니다. 음악극 <박수근의 사랑>에 음악 조감독으로 참여했습니다.


박수근 화백의 고향에서, 박수근미술관이 있는 양구에서 유가족 후손분들과 양구시민들을 모시고 초연을 하게 되어 진심으로 기뻤고 깊은 울림이 차오릅니다. 




어려운 삶 속에서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무던한 사람들의 모습에서 인간의 선함과 진실을 화폭에 담아낸 박수근 화백.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고 말하셨지만 개개인의 삶의 가볍지 않은 우직한 향기는 돌과 흙 안에서 시간으로 빚어진 화폭에 켜켜이 쌓여있습니다. 박수근 미술관에서 두 눈으로 가까이에서 직접 감상해 보니 그것이 박수근만의 생명력을 더하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되었습니다. 



미석 박수근



https://youtu.be/s2aoloHkhgU?si=zJXh0iIk4cSiesYv

2년 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렸던 박수근 님의 전시회를 학예연구사의 설명으로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박수근이 미군부대에서 초상화를 그리는 일을 할 때, PX에서 일하던 점원인 박완서 님을 만났습니다. 박수근 화가가 타계한 후, 그 소식을 듣고 유작전을 찾았던 박완서는 박수근의 생애를 글로 남겨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많은 예술가들이 한국전쟁 이후 참혹한 시대를 외면한 것과 달리, 박수근은 묵묵히 시련을 견디고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던 삶을 증언하고 싶었다고 회고합니다. 5년 뒤 박완서는 '나목'이라는 소설로 여성동아에 당선되어 작가로서 등단을 하게 됩니다.  박완서는 박수근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소설가가 됐고, 박수근은 박완서의 소설을 통해 대중에게 더 많이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죠. 참으로 깊은 인연입니다. 




그러나 보채지 않고 늠름하게, 여러 가지 들이 빈틈없이 완전한 조화를 이룬 채 서 있는 나목, 그 옆을 지나는 춥디 추운 김장철 여인들. 여인들의 눈앞엔 겨울이 있고, 나목에겐 아직 멀지만 봄에의 믿음이 있다. 

봄에의 믿음 ㅡ 나목을 저리도 의연하게 함이 바로 봄에의 믿음이리라. 나는 홀연히 옥희도 씨가 바로 저 나목이었음을 안다. 그가 불우했던 시절, 온 민족이 암담했던 시절, 그 시절을 그는 바로 저 김장철의 나목처럼 살았음을 나는 알고 있다. 


 ㅡ 박완서, 나목 (1970)




나무 한 그루를 그려보라는 질문에 나목과 비슷한 나무를 그렸던 적이 있어요. 나뭇잎이나 과실은 하나도 없고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그려진 나무. 그래서일까요. 작품들 속의 나무들을 보면서도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는 쓸쓸함이 느껴졌습니다. 특별한 무언가를 채워 넣기보다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특별함을 발견하는 시선으로 묵묵하게 일상을 채워나가고 있는지 스스로를 되돌아보았지만, 여전히 그러지 못하고 있는 날 보며 또 한 번 다짐해 봅니다. 그래도 나무와 흙이 맞닿아 있는 쪽은 뿌리를 견고하게 그려냈던 것처럼 흔들리지 않을 견고한 안정감을 봄에의 믿음으로 스스로 새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박수근 미술관









이번 공연을 통하여 악보와 MR, 피아노 반주하며 연습했던 소리가 사람의 목소리를 거쳐서 공연장에서 울려 퍼질 때 어떻게 변하는지 보았습니다. 영상음악도 영화관에서 나올 때 모니터 스피커로는 잘 들리지 않는 초저역대 음역이 퍼지며 또 다른 음악이 되는데, 비슷한 결이 아닐까 싶어요. 그냥 음악감상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고 이야기가 있는 극 안에서 녹아나 공연예술이 될 때 중요한 것은, 어렵고 화려한 화성이 아니요, 복잡한 구조의 형식도 아니요, 화려하고 세련된 듣지 못했던 새로운 소리도 아니요, 그저 마음을 움직이는 음 하나라는 것. 거기에 사람의 진실된 목소리가 묻어난 노래라는 것을 말입니다. 

특별하고 화려한 것이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진실되고 선한 박수근 화백의 작품들처럼 음악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음악이, 사람이 지향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시선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장 듀엣곡 연습 중


콘솔옆 지정석                                                                            박수근의 화폭같았던 숙소앞 풍경



그리고 모든 감각 중 제일 앞선 소리의 감각이 극에서 시간의 흐름을 주도해 나간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리허설 때 타이밍을 놓칠까 봐 긴장해서 극 흐름의 숨을 돌릴틈도 없이 급하게 큐를 하고 있었던 것이죠. 조금 여유가 생기자 대본에서 머리를 뗄 수 있었고, 무대를 바라본 후에야 큐에 호흡을 조금 줄 수 있었습니다.  음악 큐사인에 맞춰 영상과 조명도 맞춰서 유기적으로 움직입니다. 거기에 배우와 관객의 주고받는 호흡과 감정이 극장 안에 흘러 부유하는 시간까지.. 적절한 타이밍에 큐를 준다는 것이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었어요. 

영화나 방송음악의 경우는 편집을 통해 제작자의 의도에 맞게 수없이 수정편집된 영상을 제공할 수 있지만, 실시간으로 단 하나의 흐름만이 있는 공연은 그 순간만이 존재하는 시간이 순간 흘렀다가 홀연히 사라지기 때문에 긴장을 놓지 않고 집중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여전히 서툴렀지만, 아쉬움이 많지만, 그래서 극에 누를 끼친 것이 아닐까란 걱정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이 중요성을 깨달았다는 것으로도 커다란 수확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강원도 양구에 있는 박수근 미술관



박수근의 사랑이야기를 아름답고 감동적인 노래로 작편곡 하신 김동욱 음악감독님. 관객들이 박수치고 울고 웃으며 극이 끝나도 입에서 절로 흥얼거리게 감동의 선율을 담으셨습니다. 서툴렀던 저를 재촉하지 않으시고 기다려주시고 깨달을 수 있게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만들어간 손열매 조감독님께도 무한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들을 총괄하고 그림을 그려나가신 김정훈 연출감독님과 정은경 제작프로듀서님, 짧은 시간 안에 공연예술을 무대 위에서 펼쳐내신 배우선생님들(김석환 님, 이호림 님, 권상석 님, 배은지 님, 나승현 님, 박서영 님, 이승민 님, 이조이 님), 무대뒤에서 각자의 역할로 무대를 수놓아주신 많은 스태프분들도 모두 수고하셨고 감사를 드립니다.

대학로 소나무길을 오가며 배우선생님들과 함께 연습했던 시간, 새로운 넘버곡이 나올 때마다 들으면서 악보분석하고, 현장에선 음악과 음향을 오퍼레이팅 하며 극의 타임을 이끌어가는 일까지.. 23년의 겨울엔 <박수근의 사랑>으로 오래오래 기억될 것 같아요. 정말 뜻깊었고, 즐거웠습니다. 




흙처럼 살다 간 미석 박수근 화백. 햇빛과 빗물을 머금어 자연을 껴안고 품어 존재 자체로 자연스러운 생명이 참된 생명이 되게 하는 흙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해 봤습니다. 그렇지 못하기에 성찰하고 반성한다고 말하는 것조차 너무나 과한 욕심인 듯합니다. 이렇게 새해 첫날 한 번 더 마음을 정돈해 봅니다. 

새해 부디 건강하시고, 복 많이 많이 받으시기를 기도하고 기도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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