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슬 Apr 13. 2024

고요함으로 이르는 길

Human Heart - Coldplay


내적인 고요함으로 이르는 길은 어떤 길이 있을까? 고요함이란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일까? 필요하다면 그 방법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은 명상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또 누군가는 운동을 통해 몸을 단련함으로써 더불어 함께 정신이 단단해지기도 한다. 나의 경우는 주로 산책과 기도로 그 길의 문을 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는 것, 내가 취약한 부분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 적절한 거리를 느슨하게 유지하며 다정하게 다지는 참된 우정들,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최소한의 것들을 꾸준히 실천하는 것, 내가 힘들어지는 것들은 의도적으로 안 해보는 등등. 무언가를 더 많이 하기보다 차라리 툭 내려놓고 덜어내었을 때 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 자신의 속도를 늦추어 그 무엇도 자신의 내면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했죠."


제프다이어가 쓴 <그러나 아름다운>에 나오는 몽크(Thelonious Monk)의 이야기이다.

내 안의 영혼을 바라보며 자신에게 집중하여 그의 음악을 이끌어 내기 위해 의도적인 고립을 통하여 스스로에게 더 집중했다는 말이다. 시인 에밀리 디킨슨 역시 스스로 타인들과의 역설적인 단절을 통해 수많은 시를 써냈다.


무슨 일이 있다 하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강인한 버팀목이 있는 사람들은 단절이나 고립을 통하지 않고서도 많은 것들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해서 스스로의 한계를 알고 있다면, 또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내게 알맞은 방법을 찾아 경계를 세우고 확고히 행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면 의도적인 단절로 인해 고요함은 저절로 찾아질 수 있는 것일까? 이상적인 방향과, 내가 가진 방향과 마음이 말하는 방향은 다를 수 있다. 그 방법이 내게 효과적인지 시도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방법을 알아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에게 무엇을 위한 고요함일까?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신부님께서 하신 강론말씀을 꺼내 읽는다.  작년, 예수님 승천 대축일에 해 주신 강론말씀이다. 전문을 다 올릴 수는 없지만, 일부 인용하면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한 고요한 다짐을 오늘도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이 글을 읽게 될 분들에게도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독일의 실존 철학자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대학강단을 떠나는 마지막 강의에서 인용한 중세 때부터 전해지는 시귀절이 있습니다.


나는 왔구나, 온 것도 모르면서

나는 있구나, 누군지도 모르면서

나는 죽으리라, 그때도 모르면서

나는 떠나리라, 갈 곳도 모르면서

신기한 일이로다, 즐거운 이 삶.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를 둘러싼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 모든 것들은 의미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생의 궁극적인 목적과 의미를 묻는 이러한 질문들이 바로 철학의 명제들입니다.


정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왜 존재하는지

나아가 자신뿐만 아니라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의 존재이유와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의 의미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근본문제와 의미에 대한 물음에 대해서 철학적인 사고만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 또한 삶의 신비입니다.


그러면

온 것도 모르면서 갈 곳도 모르면서

그때도 모르면서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왜 신기한 일이로다, 즐거운 삶이라고 했을까요?


아마도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경험과 앎의 한계에 다다랐을 때

역설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초월하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생에 막다른 곳에 이르러서

비로소 인간은 그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던

자신의 진실을 받아들이고

삶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가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제야 비로소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의 손길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을 초월적 존재라고 말을 합니다.

초월적 존재라는 것이

이 현실을 초월하는 존재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 귀의하는 내적인 문이 열린다는 뜻입니다.


나는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삶의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라는 이 물음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나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와서 세상에 왔다가

세상을 떠나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가서 너희가 있을 곳을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네가 있는 곳에 같이 있게 하겠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존재입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주시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사랑의 능력을

이 세상에서 능동적으로 온전히 다 소모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밀알 하나가 떨어져 죽지 않으면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중략)


그 승천을 통하여

예수님의 육신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말해서

하느님과 같은 존재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 되신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과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기도 중에 받은 응답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 오, 영혼이여 네 안에서 너를 찾으라

그리고 영혼이여, 네 안에서 나를 찾으라

길을 잃었거든 갈 길을 모르겠거든 네 안에서 너를 찾으라

나는 네 마음에서 깊은 곳에

너의 모습을 그대로 닮은 너의 초상을 지니고 있다.

이를 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의문도 잠잠해지리라.”


“사방으로 찾아다니지 말라

네 안에서 나를 찾으라

너는 나의 집

나의 처소

영원한 나의 고향이다.

나는 늘 너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니 영혼이여, 네 안에서 나를 찾으라.”



하늘에 계신 그분께 닿기 위하여

영혼은 날개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영혼은 단지 홀로 고요함을 찾아가

자기의 내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그러면 너무도 귀한 손님이 그곳에 계십니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

하느님은 내 현존의 가장 깊은 곳,

내 영혼의 성에 가장 깊은 방에 거하십니다.

내 실존의 가장 깊은 밑바닥에 살아있는 샘.

모든 것을 두루 비추는 살아있는 빛을 믿습니다.  






위 말씀을 읽을 때마다 형언할 수 없는 떨림이 오면서 내적인 힘과 용기를 받는 기분이 든다.

내 안에 계신 하느님, 나의 영혼, 우주 등, 나는 모두 같은 의미로 해석하고 있다.

인상적인 말은 이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과 사랑의 능력을 이 세상에서 능동적으로 온전히 다 소모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마감하는 것, 그리고 밖이 아니라 내 안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 너는 나의 집, 나의 처소이며 영원한 나의 고향이라는 것. 너와 나는 하느님과 나를 일컫기도 하지만, 나와 나, 즉 본연의 나, 되고 싶은 나, 깊은 영혼의 나, 사랑을 실천하는 나를 일컫기도 하는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인생의 목적은 사랑받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거라고, 너에게는 너만이 완성할 수 있는 삶의 목적이 있고, 그것은 네 사랑으로 스스로 채워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 가장 깊은 방에 있는 살아있는 샘, 살아있는 빛을 믿어 보자며 스스로 다시 또 한번 되뇌어 보는 주말이다.





https://youtu.be/qOLUTIW-b10?si=ocL9qWw6GbFNf58u


Human Heart - Coldplay, We Are King & Jacob Collier




버팀목은 땅속에서 꽃을 피운다

땅속에서 꽃이 지고 열매를 맺어

땅속을 나는 새들과 함께

무릎을 꿇고 인내의 기도를 올린다

버팀의 힘이 견딤의 힘이며

견딤의 자세가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자세라고

깊게 뿌리를 뻗는다


- 정호승 <버팀목> 중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