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롬 벨의 '갈라'에 깊이 감명받다
뮤지컬 위키드에서 글린다에게 첫눈에 반한 보크가 그녀의 부탁으로 네사로즈를 파티에 초대하는 장면이 나온다. 보크는 글린다에게 잘 보일 생각으로 네사로즈에게 다가간 것이지만 휠체어에 앉아 비참하게 아름다운 그녀는 그의 호의에 감격하며 둘의 사랑을 확신한다. 그리고 지나치게 친절한 보크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못하고 결국 그 사랑에 응답하며 함께 춤을 추길 청한다. 둘은 속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함께 춤을 추며 연인이 된다. 되기는 한다.
휠체어에 앉아 춤을 추는 네사로즈를 연상케 하는 댄서의 무대를 본 적이 있다. 프랑스 안무가 제롬 벨Jérôme Bel이 만든 '갈라Gala'라는 공연이었다. 무대에는 아름답고 사려 깊은 글린다도, 순진하고 착한 보크도 없었지만 휠체어에 앉은 그녀는 어느 댄서 못지않게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위키드의 네사로즈처럼 황홀한 표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는 종종 미간을 찌푸리기도 하며 최선을 다해 춤을 추었다.
'갈라'는 재기 발랄한 의상을 갖춰 입은 아마추어 댄서들이 발레부터 즉흥춤까지 온갖 춤을 온갖 방법으로 보여준다. 그들의 춤은 우리가 으레 무대에서 보는 전문가들의 춤과는 확연히 다르다. 무대 한편에 발레라는 지시판을 세워놓고는 발레 비슷하게 보이는 어떠한 동작을 하며 무대를 가로지른다. 마이클 잭슨이라는 지시판 옆에서는 문워크를 하려는 듯 뒷걸음을 치기도 한다. 그들은 아마추어만이 가질 수 있는 날 것의 모습을 무대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어려운 동작을 할 때면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도 하고 동작을 마친 후 쑥스러워 잰걸음으로 퇴장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춤을 출 때면 이내 진지해지는 표정을 보면 누구보다 스스로의 춤과 몸을 사랑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어떠한 형식이나 기준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그대로 몸을 움직인다. 그 모습은 훈련된 댄서의 화려한 춤보다 아름다웠다.
나의 몸과 마음이 하는 소리에 온전히 귀를 기울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물며 그 소리를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어렵다. 분명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인데 '나'에게 다가가는 길은 멀기만 하다. 그 사이에 놓인 수많은 목소리와 시선들을 무시하고 지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나의 모습을 알기도 어렵고 또 보여주기도 어렵다. 가끔은 내가 듣는 노래가, 내가 입는 옷이, 내가 즐겨 찾는 카페가 나의 취향에서 비롯된 것인지 의심스러울 때도 있다. 또 가끔은 내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표정을 짓고 말과 행동을 한다고 자책할 때도 있고, 심하게 어색한 상황에 놓이면 몸속 회로가 뚝 끊긴 것 마냥 내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있다. 처음 클럽에 갔을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심하게 어색한데 심지어 온몸을 움직여야 한다니. 오감이 각자 다른 볼 일이 있어 멀리 출장을 가버린 듯했다.
흔히 사람들이 춤을 추기 위해 찾는 곳은 클럽이다. 특히 주말 저녁에는 많은 이들이 클럽을 찾는다. 그러나 이 장소는 참으로 다채로운 면모를 가지고 있기에 오히려 그곳에서는 춤이라는 행위가 무색해진다. 그리고 그 면모들이 모이고 쌓여 클럽 '문화'를 이루었고 참으로 한정적인 사람들만이 이를 즐긴다. 이 때문에 춤마저도 일부만이 즐길 수 있는 행위로 인식되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든다. 춤은 몸을 관절 단위로 나누어 움직이지 못해도, 심장으로 음악을 내리꽂는 커다란 스피커가 없어도, 술을 마시지 않아도, 화려한 옷을 갖추지 않아도, 나이가 많아도 출 수 있다. '갈라'의 댄서들이 온몸으로 보여줬듯이 말이다. 인류 역사를 거쳐 많은 이들이 예찬해왔던 춤이 클럽에서 추는 춤은 아니었을 것이다. 춤은 분명 그 이상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날 것 그대로를 보여줬던 무대에 깊이 감명을 받은 후 그들이 추는 춤이 그토록 아름다웠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춤 예찬자들 대열 꽁무니에 슬며시 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예찬해야 할 춤은 일탈을 위해 어둠 속에서 추는 춤도 아고, 새하얀 공간에 설치된 예술 작품처럼 우러러 바라볼 춤도 아니었다. 나를 자극하는 외부 환경에 오감을 활짝 열고 내가 느끼는 감정에 충실하는 것, 그래서 뇌의 지시를 거치지 않고 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 그래서 오롯이 내 존재만 남는 것. 이것이 춤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다. 일상에서는 놓치기 십상인 '나'에게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 춤을 출 때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춤추듯이 산다는 것은 내 안에 있는 '나'와 언제나 함께 산다는 뜻이 아닌가 짐작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브리다'에서 브리다는 우주의 신비를 배우기 위해 마녀를 찾아간다. 그리고 마녀는 브리다에게 꾸준히 춤을 추라고 조언한다. 노래 없이 우주의 소리를 들으며. 여기서 춤은 어떠한 박자에 맞추어 어떠한 움직임을 해야 한다는 규칙 따위는 없는, 그저 온몸을 우주의 흐름에 맡기는 움직임이다. 그리고 마녀가 되는 의식의 날, 브리다는 모닥불을 돌며 춤을 추다 열기에 못 이겨 옷가지를 하나씩 벗어버리고 무아지경에 이른다. 브리다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새도 없이 옷을 벗어던진 것이 그러했듯이 '갈라'의 마지막 무대에서 흥에 겨운 혹은 무아지경에 이른 댄서들이 그들의 옷을 벗어버린 것은 그렇게도 자연스러웠다. 치밀하고 섬세하게 짜인 그 어떤 공연보다 아름답고 황홀했던 그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