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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May 23. 2020

빛나는 이상, 가까이 그리고 온전히

평소 흥미롭게 지켜보던 한 창작 단체가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한 악세사리라며 지름이 2미터에 달하는 모자와 스커트를 소개했다. 원을 이루는 틀은 조금만 힘을 주어 구부리면 반으로 접혀 이동할 때 번거로움을 줄여주었고, 새하얀 레이스 천으로 덮인 원은 햇빛 아래에서 예쁜 그림자를 드리워 볼거리까지 제공했다. 아름다움과 실용성을 모두 잡은 기발한 제품이었다. 그러나 이 제품을 보자마자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이 단체는 몇 년 전부터 난민들을 위한 쉼터를 운영하고 있었고 코로나 이후에는 생계가 어려워진 이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나누어주는 등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이 이 시국에 쓸모없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비웃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이 초유의 사태를 대하는 그들의 유머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었다. 위기 속에서 유머를 잃지 않는 모습은 본받을만하다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꼭 그랬어야 했냐는 의문이 떠올랐다.


실생활에 사용될 일은 결코 없을  제품을 보며, 그리고 이를 위해 그들이 들였을 노고와 열정을 짐작하며 내가 떠올린 것은 최근에 읽은   권이었다. 너무나 박학다식한 저자의 언어를 이해하느라  번이나 문장을 반복해서 읽어야 했던  책은 오늘날 포퓰리즘 우파 정치가 득세하게  원인을 분석하는 내용이었다. 여러 석학이  글을 모아놓았지만 책에서 반복되어 언급되는 것은 좌파 정치의 오판이었. 소위 경제, 문화 엘리트라 분류되는 집단과 결탁한 좌파 정치는 밀려드는 세계화에  자리를 잃고 위태로이 존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외면했다. 엘리트들이 관심 있는 것은 서민들의 삶보다는 더욱 높은 곳에서 빛나는 이상이었다. 그러니까,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 남녀가 평등한 세상, 모두가 자유로이 사랑할  있는 세상같이 요즘 우리의 일상에 깊이 스며든  이상적인 세상 말이다. 생계에 떠밀려 반짝이는 별을 쳐다볼 여유가 없는 사람들은  빛나는 이상을 이야기하는 정치에 공감하지 못했고, 그들이 듣고 싶었던 말을 그들이 듣기 쉬운 언어로 대답한 것이 포퓰리즘 우파 정치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땅을 살피기도 바빴을 이들은 억하는 심정으로 반짝이는 별을 노려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실용적이고 아름답지만 사회적 거리두기가 야기된, 그리고 초래할 문제의 본질을 외면한 이 제품을 보고 코웃음을 쳤던 것이다. 유머를 잃지 않는 것은 삶을 대하는 중요한 덕목이 될 수 있지만 그들의 유머는 아무래도 가벼웠다. 모든 것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는 프랑스인들을 보며 종종 상처 받듯이 그들의 유머는 아무래도 무례했다. 사람들 간 접촉이 위험이 되는 세상은 결코 즐겁지 않으며 2미터씩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다. 인간이 생태계를 어지럽혀 점점 잦은 주기로 바이러스가 발생하는 세태에 대하여, 바이러스가 일파만파로 퍼지는 동안 안일한 태도를 보였던 프랑스 정부며 오만한 태도를 보였던 시민들에 대하여 유머를 던졌다면 망설임 없이 웃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나아가 그들이 물리적 만남이 어려워지며 많은 이들이 겪을 고립과 결핍에 대하여, 인간이 바이러스 전파 수단이 되어버려 발생한 소외와 기피에 대해여 대안을 내놓았다면 박수를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유머가 빛나지 않은 것은 정작 중요한 본질은 들여다보지 않고 겉만 맴도는 수준에서 떠오른 대답을 유머로 포장해 내놓았다는 것이다. 그럴싸한 외형에 자연스레 눈길이 가는 번지르르한 대답이었다.


개인이, 혹은 한 단체가 사회의 모든 문제를 다루고 또 이를 해결할 수는 없다.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행동하는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다른 단어를 외치며 이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더라도 결국 바라보고 있는 이상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러 종교가 그러하듯이 말이다. 만약 환경 보호를 외치면서 인종 차별을 하고, 성차별에 맞서 싸우면서 성소수자를 비난하고, 빈부 격차에 분노하면서 노동자 문제를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우스울 것인가. 문제는 상상하면 우스운 이 행태를 행여나 현실에서 마주하면 우습게 넘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니, 현실에서는 사람들이 우습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그럴싸하게 포장된 채로 실현된다는 것이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 안에는 결국 그 어떤 문제의식도, 이상도, 신념도 들어있지 않다. 사람들은 포장지에 현혹되어 그 내부를 바라보지 못하거나, 다행히 포장지를 벗겨낸 경우에는 텅 빈 상자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한다.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이상이 올바른 사고와 정직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굳이 포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고자 하는 이상이 많은 이들이 납득할 만한 것이라면 이 역시 포장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화려한 포장은 오히려 반감을 사 이상의 가치를 훼손할 수도 있다. 그보다는 솔직 담백한 소통과 땀 흘리는 손과 발이 더 많은 일을, 더 긴 시간에 걸쳐 해낼 수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포장이 필요한 경우는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한 때다. 올바른 사고와 정직한 동기를 가진 이상을 많은 이들에게 소개하고 납득시키고 싶을 때 포장은 좋은 효과를 낼 수 있다. 예를 들어 유머를 이용한 포장이라든가 예술 문화를 이용한 포장을 이용하면 사람들에게 한결 쉽게 다가갈 수 있다. 다만 포장은 수단일 뿐이다. 주와 객이 전도되어서는 안 된다. 포장을 위해 이상을 이용해서도 안된다. 포장의 종류도 이상의 성격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 언제나 본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에게는 진리에 가까운 이상이 누군가에게는 그저 이익을 가져다주는 수단으로 보일 수도 있다. 좇으면 그럴듯해 보이는 유행으로 보일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의 삶과 신념을 무너뜨리는 악의 근원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는 다양한 현안들에 대해 깊이 고찰하고 함께 토론해야 한다. 다양한 높이와 다양한 시점에서 바라보고, 다양한 이들이 목소리를 내고 또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 깊이에 있는 본질을 발견하고 그것에 대해 다수가 이해하고 동의했을 때 진정 빛나는 이상이 될 수 있다. 뛰어난 사고와 넘치는 지식으로 바닥을 바라볼 일이 적은 엘리트들이 제시하는 이상은 하늘에 떠있는 별처럼 멀게만 느껴질 뿐이다. 탐욕을 위해 이상을 이용하는 장사꾼들이 제시하는 환상은 반짝이는 별의 빛을 받았다며 길거리 돌멩이를 가져다 파는 저속한 사기극일 뿐이다. 저 멀리 몇 광년 떨어진 별과 추잡한 속내를 감춘 값비싼 돌멩이가 공존하는 오늘날, 우리 가까이에 온전하게 존재하는 이상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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