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는 먼 거리를 매우 빠른 시간 안에 이동할 수 있고 사람들 사이의 소통 역시 그만큼 편리해진 세상에 살고 있다. 말을 달려 소식을 전달하던 시대를 뒤로 하고 근대에 이르러 수없이 많은 우편물들이 운송되었으며 전화기 너머 생생히 들리는 음성을 통해 실시간으로 대화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해리 포터와 시리우스 블랙의 벽난로 대화는 여러모로 가뿐히 뛰어넘는 고화질 영상 통화도 대중화된 지 오래다. 뿐만 아니라 기술의 발전과 대중화로 소통을 하는 방법도 다양해져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매체가 소셜 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오늘날 사람들의 관계 유지에 큰 몫을 하고 있다. 어쩌면 홀로 그 큰 짐을 떠안고 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고향을 떠나 이 도시 저 도시로 터전을 옮기는 삶을 살게 되면서 나 역시 기술의 혜택을 톡톡히 누리고 있다. 처음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왔을 때 나는 언니와 이메일을 주고받으며 소식을 전했고 역시 이메일로 약속 시간을 정해 영상 통화를 했었다. 가족이 생각날 때 언제든 통화를 할 수 있는 것은 미래 세계의 일이었다. 그해 겨울, 프랑스에 놀러 온 친구가 전면이 스크린인 최신식 휴대 전화를 사용했다. 마네킹 같은 여가수가 몸에 쫙 달라붙는 옷을 입고 제품에 대한 것인지 본인에 대한 것인지 애매한 노래에 맞추어 춤을 추며 광고하던 그 휴대 전화였다. 노트북만큼이나 다재다능한 초소형 기계를 만난 충격은 아직까지 꽤나 선명히 남아있다. 그리고 그때에는 놀라움을 자아냈던 일이 몇 년 사이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버렸다.
시간을 더 거슬러 휴대 전화가 대중화되기 전을 떠올려 보자.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친구와 연락하기 위해서는 집으로 전화를 걸어야 했다. 아직도 외우고 있는 그 전화번호를 누르면 친구와 이야기하기 전에 친구의 어머니나 할머니, 혹은 동생과 먼저 인사를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엄마에게 전화 예절에 대한 교육도 받았다. 가끔 친구 어머니와 짧은 대화를 나눌 때도 있었다. 덕분에 친구네 집에서 가족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전화로는 용건만 간단히.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은 직접 만나야 가능했다. 그때에 전화기는 나의 세계와 친구의 세계를 연결하는 수단 중 하나였다. 요새는 모두가 휴대 전화를 가지게 되면서 개인과 개인이 바로 연결된다. 여기서 개인의 ‘세계’는 배제되고 오로지 개인만 존재한다.
오늘날 휴대 전화를 보면 해리 포터의 마법 지팡이가 부럽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물론 지팡이가 훨씬 낭만은 있겠다만 그 까다로운 사용법을 생각하면 이 최신 기술이 응축된 기계가 낫겠다 싶다. 낭만은 조금 덜할지라도 휴대 전화는 단순한 사물을 넘어서 우리 삶에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선 기능적인 면에서 전화기의 진화물이라는 설명이 무색할 만큼 휴대 전화로 할 수 있는 일은 무궁무진하다. 전화와 문자는 기본, 음악도 들을 수 있고, 게임도 할 수 있고, 계좌 이체는 물론 결제도 되고, 길도 찾을 수 있고, 그림도 그리고 음악도 만들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 안에는 세세한 개인 정보부터 시작해 추억을 담은 사진과 영상, 그리고 많은 이들의 연락처에 이르기까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을 대변할 수 있는 무수한 정보들이 담겨있다. 휴대 전화는 현대인의 분신이 되었다.
한때 전면이 스크린인 휴대 전화에 감탄하던 나도 이제는 영혼의 단짝처럼 언제나 휴대 전화와 함께 한다. 이 마법 지팡이가 할 수 있는 많은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진짜 영혼을 가진 사람들과 연결시켜주는 것이다. 휴대 전화를 통해 나는 어디에서든 문자, 전화, 영상 등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과 연결될 수 있다. 용건만 간단히 해야 했던 통화는 이제 시간에 관계없이 한없이 늘어질 수 있고 글자 하나하나 신중하게 써 내려가던 편지는 방귀를 뀌듯 힘없이 나오는 글자와 이미지들이 대신했다. 말을 통해서든 글을 통해서든 연락은 쉬워졌지만 또 그만큼 가벼워졌다. 멀리 있는 친구와 통화를 하고 전화를 끊으면 내가 지금 있는 이곳이 문득 낯설어졌다. 전파 너머에 있는 친구는 저 멀리 하늘을 날아가는 새와 같았다. 분명 존재하고 내 시야에도 보이지만 내가 있는 이곳의 현실에는 개입할 수 없다. 그저 한순간 내 눈에 보였을 뿐이다.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통신 기술은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방법에도 영향을 미쳤다. 기술의 혜택이 없었다면 이별이 지금보다 훨씬 더 애달팠을 것이며 한참 소식을 듣지 못한 그들의 삶을 상상하며 언젠가 다시 마주칠 그날을 더 간절히 고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소식을 궁금해하지도, 인연이 끊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큰 노력을 들이지 않더라도 휴대 전화와 SNS 계정 안에 자동으로 인연이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의 인연은 범위가 넓어졌을 뿐 아니라 언제든 실시간으로 닿을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이토록 서로가 고도로 연결된 사회에서 그 관계가 얼마나 풍족해질 것인가 짜릿하기만 하다. 그랬어야 했다. 그러나 실상은 다르다. 제법 길어진 메신저의 친구 목록을 훑어보아도 정작 편하게 전화를 걸 수 있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 목록의 길이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관계의 밀도가 얕아졌다고 느꼈다.
만날 때가 되어 만나고 헤어질 때가 되어 헤어지는 것이 아름다운 인연이다. 회자정리 거자필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친구를 맺는데 한번 동의하고 나면 그 아름다워야 할 연이 질긴 고무줄이 되어버린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만 먹으면 닿을 수 있기 때문에 인연을 우연에 맡기는 것은 관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방만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인연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새로운 곳에 와서도 여전히 다른 곳에 있는 인연들과 연결되고자 노력했다. 그리운 마음과 집착 같은 욕심과 죄책감이 섞인 노력이었다. 그러나 멀리 떨어져 있는 인연을 붙잡는 것은 하늘을 날아가는 새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 익숙함과 가벼움에 취해 지금 이곳에 있을 수 있는 새로운 인연을 외면할 수 있는 변명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는 인생은 원래 고독한 것이라는 알랑방귀 같은 소리로 스스로를 위안했다. 종종 날아가는 새를 향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기도 했다.
기술을 통해 만남이 편리해진 관계는 그 발전과 이별도 편리해졌다. 버튼 몇 번만 누르면 언제든 상대의 연락을 차단할 수 있다. 아주 쿨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최악의 경우는 소통이 제외된 채 연결되는 것으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SNS에 올리는 게시물로 소식을 주고받는 관계가 그런 것이다. SNS는 일방적으로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것을 불특정 다수를 향해 발산하는 것일 뿐이다. 상대에 대한 배려는 차치하고 수신인조차 분명치 않으니 그것은 소통도 아니고 관계도 아니다. 또한 그 안에서 보이는 개인의 세계는 주관적인 편집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그 사람을 안다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그것은 관계와는 무관한, 개인적인 추억이나 과시적인 포장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전화기가 개인의 ‘세계’를 타인의 것과 연결시켜주는 수단이었다면, 휴대 전화는 ‘개인’의 세계를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다.
서로 쉽게 연결되는 세상에서 관계는 가벼워졌고 또 그렇기 때문에 어려워졌다. 문제는 언제 어디서든 연결될 수 있다는 편리함이 아니라 그것이 관계를 맺는 현대식 방법이라고 믿는 것이다. 쉽게 보내지는 안부와 이모티콘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양분이 되어준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관계는 상호적인 소통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고, 또 배려와 이해를 통해 단단해질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발전된 기술이 이 시간과 노력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상대가 본인의 '세계'를 열기 위해 그리고 그 '세계'를 내가 이해하기 위해 마음을 쓰는 것이 진짜 관계를 위한 노력이다. 기술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을 도와줄 수는 있어도 마음을 대신할 수는 없다. 빨간 하트는 따뜻한 마음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