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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Aug 14. 2020

나의 아득한 시간에서 너의 견고한 시간에게

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파란 바다를 뒤로 하고 남편과 함께 서 있는 너의 사진을 보았어. 둘은 손을 길게 뻗어도 닿지 않을 만큼 멀찍이 서있었지만 한쪽 다리를 바닥에서 뗀 채 서로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있더라. 사진 아래에 적힌 반갑다는 인사를 보고 둘의 환한 미소가 너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어.

우리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같은 교실에서 보충 수업을 듣고 야자를 하고, 방학에도 매일 학교에 나와 함께 공부를 하던 때가 기억나. 한 번도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지만 나는 그 삼 년을 내내 너와 보낸 것 같아. 그렇게 치열하게 입시를 치르는 중에도 우리는 미래에 대한 걱정은 한 번도 하지 않았어. 선생님들에 대한 불만을 늘어놓고 학교 옥상에서 골프를 치는 이사장의 아들인 갓 취임한 교장을 욕하고 그리고 연예인들의 사진을 나누어 보곤 했지. 대학에 들어간 후 우리는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아주 가끔씩 맥주를 마시며 그때와 다를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어. 더 이상 교복 차림이 아니라는 것과 불만의 대상이 선생님이 아니라 정치인이 되었다는 것만 달라졌어. 내가 프랑스로 떠난 후에도 우리는 아주 가끔 만났었지.

마지막에 만났을 때는 연인이 없던 네가 어느새 결혼을 하고 그리고 이제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어. 갑자기 뭉클한 마음이 밀려왔어. 오래고 먼 친구가 엄마가 된다는데 왜 내가 두근거리는지 청승맞다고 생각했어. 벅찬 마음을 그대로 전하고 싶었지만 꼭 만나서 축하할 일이라고 느껴져 연락을 하지 못했어. 멀리서 전하는 인사는 너무 가벼워 보일 것 같았어. 옆에 있지 못하는데 전하는 소식이 무슨 소용이 있나 싶었어. 아무리 긴 통화로 미주알고주알 소식을 알린다고 해도 우리는 언제나 멀리 있는 사이니까. 내가 네가 있는 곳을 향해 아무리 몸을 기울이고 손을 뻗는다 한들 나는 그곳에 네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으니까.

내가 한국에 돌아가 언제든 너를 만날 수 있을 때, 그때 지금 이 마음을 전하고 싶어. 언제나 그곳에서 삶을 살아간 너의 시간은 나의 시간보다 더 견고히 쌓이고 더 멀리 나아갔겠지만 다시 만나 낙엽만 굴러가도 웃음을 터트리던 그때처럼 함께 웃었으면 좋겠어. 나는 아직도 그때가 몹시 가까운 과거인 것 같아. 멀리 떠나온 나는 여기에서도 여러 번 짐을 싸 여기에서 저기로 옮겨 다녔는데 이상하게 내 시간은 꼼짝도 하지 않은 것 같아. 나의 시간은 차곡차곡 쌓이지 못하고 내가 지나간 길 위에 흩뿌려진 것 같아.


너무나 아득해서 감각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익숙해지니 프랑스에 오기 전에 나의 시간이 어떠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너와 함께 카페의 에어컨 바람에 몸을 떨면서 팥빙수를 먹었던 기억은 있는데 그곳에 가기 위해 어떻게 약속을 잡았는지, 그다음에는 어떤 기분으로 집에 돌아갔는지 생각이 나지 않아. 무엇보다 내가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사람들과 어울렸는지 모르겠어. 그때는 언제나 누군가를 바라보며 말을 하고 웃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함께한다는 것이 참 쉬웠는데 말이야.


이곳에서 보낸 시간은 정지된 시간 같아. 분명 나도 똑딱똑딱 돌아가는 손목시계를 보았고 뜨고 지는 해를 따라 하루하루를 보냈는데 말이야. 이곳은 마치 사용자가 로그아웃한 동안 홀로 남은 게임 속 세상 같아. 바깥 시간이 어김없이 흘러가는 동안 게임 속 시간은 그대로 멈추어 있지. 나는 그 정지된 세상을 매일 아침 실감했어. 아침에 눈을 뜨면 언제나 나보다 먼저 일어난 고요가 나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거든.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왜 눈을 떴는지 의아해하며 말이야. 수백 킬로를 이동해 새로운 도시로 이동해도 언제나 똑같았어. 그러나 아무리 만나도 당최 익숙해지지가 않는 고요인지라 나는 어딜 가나 언제나 새로 시작해야 하는 낯선 사람으로 남아 있어.

그래서 몸과 마음이 지칠 때까지 움직이고 또 움직였음에도 여전히 멈추어 있는 내가 지금 너에게 전할 이야기는 없어. 내가 다시 나의 시간을 되찾았을 때, 나의 시간이 온전히 나와 함께일 때, 너를 만날 거야. 너를 만나면 나에게도 시간이 착실히 흘러가던 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될 거야.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어도 너와 함께 있으면 그때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내가 없던 그 시간 동안 너는 그 시간을 이어서 살아갔으니까. 그때가 되면 나의 시간도 너와 멀지 않은 곳에서 견고히 흘러갈 거야. 그리고 우리의 시간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매일 아침 소란스레 눈을 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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