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입을 일이 평생 단 한 번도 없었지만 한복을 갖는 것은 평생 꿈 중 하나였다. 그리고 드디어 한복을 맞췄다. 사극에서 볼 때는 알록달록하든 은은하든 마냥 예쁘기만 했던 한복이었는데 막상 고르려니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며칠을 인터넷을 찾고 찾아 노랑과 파랑의 조합으로 마음을 정한 후 원단 집에서 고심 끝에 그러나 너무나 긴 고심 끝에 조금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며칠 후 완성된 한복을 받았다.
한복을 맞춰 준 큰 이모가 이른 아침 한복을 받아 집으로 가지고 오셨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이모가 불쑥 내민 회색 봉투를 받아 들었을 때 그 단출함과 가벼움에 사뭇 놀랐다. 상자를 열어 고이 접힌 옷을 보자니 옷걸이에 걸려 있는 양장에 비해 참으로 다정스러운 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정 밑에 분홍 꽃수가 놓인 노란 저고리는 소박하니 앙증맞았고 파란 원단이 촤르르 펼쳐진 치마는 그 색과 질감이 퍽이나 아름다웠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몽글몽글 따스해졌다. 한복이 낯선 나를 위해 큰 이모가 직접 나서 치마를 입혀주고 저고리 고름까지 묶어주었다. 한때 한복 짓는 일을 업으로 삼았던 이모는 남의 고름을 묶어주는 것이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라며 되풀이와 망설임을 몇 번 반복한 끝에 고름을 완성시켰다.
한바탕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모양새를 확인하고 이 각도 저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본 후 얼른 한복을 벗었다. 고운 옷에 뭐라도 묻을까 염려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복이 든 상자를 덮자마자 마음은 다시 한복에게로 갔다. 한복을 차려입는 것보다 한복을 입는 과정을 다시 해보고 싶었다. 원단들이 스치며 내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평면으로 재단된 옷에 내 몸이 들어가 입체감을 갖는 순간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양장이 정장이 된 오늘날 굳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유난스러운 일처럼 느껴졌지만 적어도 한복을 차려입는 그 순간만큼은 그 옷이 의미를 가졌기에 좋았다. 과거처럼 한복을 입고 있는 일상생활을 경험할 수는 없어도 한복을 입는 순간은 경험할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과거에 한복을 입던 사람들의 삶을 공유할 수 있었다.
큰 이모가 떠난 후 상자를 열어 다시 한복을 꺼냈다. 속치마를 입고 그 위에 겉치마를 걸치기 까지는 했는데, 치마의 어느 쪽 끝자락이 위로 올라가 치마를 여며야 하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엄마도 치마 끝자락을 왼손으로 잡아서 여미던가 아리송해하며 치마끈을 묶어주었다. 그러나 그다음 더 큰 난제가 있었으니 바로 고름이었다. 평소 리본 매듯이 했더니 고름의 고리가 위로 솟구쳐버렸다. 엄마도 해결할 수가 없는 문제였다. 큰 이모가 고름과 씨름할 때 눈여겨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데 엄마가 소파에 앉아있던 할머니를 불렀다. 할머니에게 물어볼 생각조차 하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우리 가족 중 한복을 가장 오래 입은 사람이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무릎을 짚고 겨우 일어나서는 치마 입는 법부터 다시 알려주었다. 오른쪽 끝자락이 위로 올라와 왼쪽으로 여미는 것이 맞았지만 헷갈리지 않고 알 수 있는 방법은 따로 있었다. 치마 주름이 오른쪽은 끝까지 잡혀있고 왼쪽은 그렇지 않았다. 할머니는 왼쪽 끝자락에서 주름이 끊긴 것을 보고는 옷을 제대로 만들었네, 이게 밖으로 나오면 쌍놈 소리 듣는겨, 라고 호되게 칭찬을 했다. 그런 후 내 앞에 구부정이 서서는 저고리의 고름도 막힘없이 묶어주었다. 느릿느릿하지만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손동작이었다. 그 후로도 내가 고름을 풀고 다시 보여달라고 하면 몇 번이고 고름을 묶어 보여주었다.
긴 거를 갖다가 이렇게 하고선 이 마디가 울로 올라오는 거여 이렇게, 야, 이렇게 해서 이놈을 이 뒤다가 지어, 야, 이 마디가 두 개 다 울로 올라가는 거여 밑으로 오는 게 아니고, 그러고선 헐거웅게 이놈을 지고선 이놈을 이렇게 해여, 이렇게 해갖고 요렇게 펴어, 요렇게 판판하게. 우리 할머니는 모르는 게 없네. 아이 옛날엔 이렇게 입고 살았잖아.
할머니는 이렇게 입고 옛날에 살았었다. 그것은 내가 알 수 없는 옛날이었다. 할머니와 나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았다. 내가 세상을 배워가며 삶을 만들어갈 때 할머니는 이미 만든 삶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어려서 시집을 온 후로 같은 마을, 같은 집에서 평생을 산 할머니에게 사회라는 것은 그 마을 사람들과 식구들이 전부였다. 나와 할머니는 가족이라는 끈끈한 울타리 안에 함께였지만 우리 둘이 사는 세상 사이에 교점은 없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나의 삶에 있었지만 나는 할머니가 살았던 세상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내게는 나의 것과 사뭇 다른 세상을 고이 품고 있는 할머니의 삶이 더없이 귀하다.
내가 알지 못하는 것,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을 할머니는 생생히 살아냈다. 일본군이 쌀을 뺏어간 이야기나 북한군이 사람들을 잡아간 이야기를 하는 것은 할머니에게 기억 한 조각을 꺼내는 일일 뿐이다. 내가 물으면 할머니는 마치 어제 길가에서 누구를 만났다는 일상 이야기를 하듯 가볍게 일본군 이야기를 툭툭 꺼내놓는다.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역사책에서 볼 수 있는 과거의 이야기를 그토록 무심히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내가 그 역사의 흐름 속에 놓여있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해 준다. 역사 이야기뿐 아니라 할머니는 한복을 입는 법이며, 장을 담그는 방법, 텃밭에 배추를 심는 방법 등등 많은 지식을 알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잊혀지거나 등한시되고 있는 소중한 지식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할머니만이 줄 수 있는 소박하고 진솔한 지혜가 가장 좋다.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작은 세상을 산 할머니는 이해관계가 복잡한 사상이나 편견, 유행 따위에 젖지 않을 수 있었다. 할머니는 자신이 서있는 그 공간 속의 삶을 살았고 오직 그곳의 문화와 관습만을 익혔다. 더욱이 그때 그곳의 세상이 그저 그러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십 년 시간에 마음이 마모되어서인지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신념도, 세상에 남기고자 하는 욕심도 없다. 그래서 할머니가 내게 당부하는 말들은 순수한 인정에서 나오는 말들이다. 삶을 살아보니 얻게 된 아주 간결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진리들이고 사랑하는 손녀를 위하여 나오는 진실된 마음이다. 손녀를 위한다는 것 역시 오롯이 나의 삶을 위한 것이지 그 주변에 펼쳐진 세속적인 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나는 할머니와 달리 어느 사상과 편견, 유행에 젖어 있는 삶을 살고 있기에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가 알고 있는 맥락과 배경에 맞추어, 그리고 나의 사상과 가치에 빗대어 세상에 외치고 세상을 이해하고자 분투한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할머니의 세상을 더 갈구하는지도 모르겠다. 알지 못하니 맥락도 배경도 사상도 가치도 판단할 수 없고, 그러니 얼마나 맑은 세상이겠는가. 그리고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그 맑은 세상을 나와 이어주는 것이 바로 우리 할머니이다. 내가 아무리 한복 입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들 그 과거를 몸소 살았던 할머니만 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