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할머니는 어느새 진짜 할머니가 되어있었다. 짧게 자른 머리칼은 푸석푸석하게 세었고 푹 패인 눈두덩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는 희뿌옇게 빛을 바랬으며 얼굴 곳곳에는 검은 반점이 나있었다. 아직 머리칼이 검은 우리는 상상하지 못할 길고 긴 시간을 헤쳐온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몇십 년을 할머니라고 불러오던 할머니가 언제나 할머니이기는 했지만, 우리 할머니가 누구에게나 할머니로 불릴 노인이 된 것은 새삼스레 낯선 일이었다.
나를 보러 서울에 올라온 할머니는 침침한 눈을 천천히 깜빡거리며 무엇이든 천천히 바라보고 천천히 움직였다. 그 모습은 갓 태어나 연약한 짐승이 낯선 세상을 경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점점 강인해질 그 어린 짐승과 달리 할머니에게는 점점 더 작아지고 약해질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소파에 앉아 가만히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종종 텔레비전을 켜놓을 때도 있었지만 할머니에게는 창 밖이나 텔레비전이나 딱히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텔레비전을 바라보는 할머니를 보며 화면 속 영상이 과연 할머니의 눈 안으로 제대로 전달이 되는 건지 의아해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그렇게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루를 보냈다. 할머니에게는 하루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나는 가늠할 수가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할머니의 어깨를 감싸며 '할미 왜 그러고 가만히 있어?'라고 물으면 할머니는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으며 '심란해서 그려'라고 짜증 섞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논밭을 향해 탁 트인 본인의 집을 두고 서울의 작은 집에 앉아 있으려니 갑갑스러운 것이다. 또 할머니는 종종 애달픈 목소리로 '이제 갈 곳에 갈 때가 되었는디'라고 말했다. 그 갈 곳에 가지 못하는 처지가 퍽이나 속상하고 짜증스러운데 그것이 뜻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더욱 속상하고 짜증스러워하는 할머니가 애달팠다. 그 갈곳과 그때는 할미가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애달파 마시라고, 그저 내 옆에서 지금 즐거운 마음으로 계시라고, 나를 위해 그렇게 해달라고 옆에 앉아 할머니를 살포시 안았다.
할머니는 어린아이처럼 작아져 두 팔로 안으면 품 안에 쏙 들어왔다. 할머니는 내가 안을 때마다 그 안에서 천천히 숨을 쉬며 가만히 있었다. 솜털을 안듯이 가벼워 그렇게 몇 시간이고 있어도 힘이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안고 있지 않으면 천천히 내쉬던 할머니의 숨이 갑자기 꺼져버릴 것 같았다. 그러나 꼬옥 감싸줘야만 버틸 것 같은, 너무나 작고 약한 할머니의 존재는 안고 있는 나의 마음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힘을 가지기도 했다. 그 힘은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듯 여리지만 또 너무나 고요하고 평온한 할머니의 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다행히 할머니의 숨은 바스러지는 일 없이 늘 평온했고 매일 아침 눈을 떠 어찌어찌 하루를 보낸 후 눈을 감고 다음 날 다시 눈을 뜨는 일상을 이어갔다. 할머니는 매일 아침 내게 오늘도 나가느냐 물었다. 그리고 내가 외출할 때면 언제나 일찍 들어오라고 일렀다. 하루 종일 갑갑하니 곁에 있어주길 바라는 할머니였지만 막상 내가 옆에 바싹 붙어 말을 걸면 이내 귀찮아하며 저리 가라 심술을 부렸다. 그러다가는 멀찍이 앉은 내게 슬며시 장난을 치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나는 할머니의 그 웃는 모습이 마음 찡하게 좋았다. 할머니가 얼굴 가득 웃음을 띌 때면 얼굴에 새겨진 주름들이 생생히 살아나는 듯했고 덕분에 생기를 띈 할머니는 마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얼굴에 퍼진 웃음이 할머니의 온몸으로 퍼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가 내게 장난을 치고 웃을 때마다 마음이 얼마나 놓였는지 모른다.
어느 날 아침에 무슨 음식을 갖다 줘도 입만 대고 말던 할머니에게 냉동고에 있던 떡 두 조각을 녹여 갖다 주니 할머니는 이게 뭐냐며 싫은 기색을 하면서도 금세 떡을 다 먹었다. 다음 날, 외출 준비를 하는 내게 할머니가 '어제처럼 떡 좀 해다 줘'라고 퉁명스레 말했다. 나는 귀찮은 기색을 하며 냉장고로 향했지만 그 순간 할머니를 꼭 안아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담지 않은 듯 텅 빈 눈동자로 가만히 앉아 있던 할머니가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아무 욕망도 갖지 말라는 어느 성인의 말이 그토록 허투로 느껴진 적도 없었다. 나는 할머니가 계속해서 무언가를 원하고 그것을 가짐으로써 만족해하고 그래서 갈 곳을 갈망하는 대신 하루하루를 기꺼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하루하루를 나와 더 많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