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주 디아 : 비컨 미술관
뉴욕은 여기가 바로 대도시고 멜팅팟이라고 극성스럽게 외치는 도시였다. 고층빌딩과 인파가 서로 경쟁하듯 끝없이 늘어선 맨해튼과 낡고 낮은 건물들 사이에서 뜨겁게 달구어진 시멘트 바닥의 브루클린을 오가는 일정은 감탄보다는 탄식을 더 자주 내뱉게 했다. 화려하고 다채로운 도시는 분명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나와는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의 친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센트럴파크를 이야기했으나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람들을 지나 어마어마한 빌딩 사이의 공원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친구의 또 다른 제안은 뉴욕 근교 비컨Beacon에 자리 잡은 현대미술관 디아Dia였다. 그렇게 30도를 훌쩍 넘는 뜨거운 날씨에 그랜드 센트럴 역에서 기차를 타고 뉴욕 도심을 떠났다. 기차역 매표소에서 왕복 기차표와 미술관 입장권을 패키지로 한 번에 구매할 수 있었다. 할렘을 지나 북쪽으로 향하는 기차는 곧 허드슨 강의 아름다운 풍경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강물과 너그러운 능선을 눈으로 좇다 보니 기차는 금세 비컨 역에 도착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자연밖에 없는 풍경은 뉴욕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변방으로 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허허벌판과 같은 풍경 속에 다행스레 미술관을 가리키는 표지판이 놓여 있어 쉽게 길을 찾을 수 있었다. 5분 정도 걷다 보니 갈림길 한 편에 가지런히 놓인 ‘디아 : 비컨’이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길을 꺾어 들어가 푸른 나무를 듬성듬성 심어놓은 주차장을 지나니 검은 벽돌의 낮은 건물이 나타났다. 그 왼편으로 이어진 길의 끝에는 사람 키를 훌쩍 넘는 관목 뒤로 붉은 벽돌의 건물이 놓여 있었다. 첫 번째 건물은 매우 조용했기에 길을 따라 관목 사이로 들어갔다. 관목과 건물 사이의 아늑한 공간에는 정사각형의 철제 테이블이 여럿 놓여 있었고, 환히 개방된 유리창을 통해 건물 내부의 매표소와 레스토랑이 보였다. 매표소에 물으니 기차역에서 구매한 입장권을 동그란 철제 배지와 교환해주며 처음 마주한 건물이 전시장의 입구라고 알려주었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니 각각 ‘Dia : Beacon’과 ‘Riggion Gallery’라는 철제 글자가 걸린 두 개의 시멘트 벽 사이에 유리 미닫이 문 두 개가 소박하게 놓여있었다. 그러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선 내부에는 입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던 너른 공간이 시원스레 펼쳐졌다. 극적인 효과를 위해 일부러 입구를 단출하게 만들었나 싶을 정도였다. 몇 개의 벽이 공간을 나누고 있었지만 워낙 드넓은 공간이었기에 나뉘어있다는 인식조차 들지 않았다. 천장에 뚫린 유리창을 통해 환한 빛이 들어오는 내부는 나무 바닥을 제외한 모든 벽과 천장이 흰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이 넓고 밝은 공간에 내로라하는 현대 미술 작가들의 작품이 여유로이 전시되어 있었다. 대부분이 설치 작업이었던 작품들은 넉넉한 공간에서 더욱 제 진가를 발휘하는 듯했다. 산책하듯 공간을 넘어 다니며 만나는 작품들은 산에서 나무를 만나는 듯 자연스레 공간에 녹아들어 있었다. 그리고 걸어도 걸어도 계속되는 전시는 야외까지 이어진다고 하니 산에 비유하는 것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넓은 전시 공간이었다.
1974년 뉴욕에 문을 연 디아 미술관의 미션은 그 규모와 크기 때문에 실현되기 어려운 작품들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개관 초기에는 대부분의 작품들이 미술관 바깥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디아는 쉼 없이 새로운 작품을 수집하며 그 규모를 키워나갔고 오늘에 이르러는 뉴욕과 비컨, 미국 서부, 독일에도 문을 열었다. 그중 2003년에 개관한 비컨의 미술관은 박스 인쇄 공장 건물을 개조하여 만든 광대한 전시 공간을 자랑하며 디아의 초기 미션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설립 이후 특별전 기획과 퍼블릭 프로그램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며 비컨을 현대 미술의 새로운 거점으로 탈바꿈시키고 있다.
방문객이 웬만큼 오지 않고서야 붐빌 일이 없을 것 같은 너른 전시장은 참으로 한적했다. 아티스트의 깊은 의도까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적재적소에 알맞게 설치된 작품들을 보며 큐레이터와 미술관의 노고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 창을 통해 환한 햇빛과 푸르른 나무를, 그것도 뜨겁게 달궈진 야외보다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감상할 수 있으니 마음이 한껏 너그러워졌다. 모호한 작품이 만든 혼란도, 끝없는 공간이 만든 피로도 모두 달래주는 미술관이었다.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 뉴욕으로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돌리는데 아쉬운 마음이 짙게 남았다. 기차를 타고 갑작스레 평화로운 전원으로 넘어갔듯 갑작스레 요란스러운 도시로 돌아오니 디아 미술관이 꿈속의 낙원처럼 아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