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아스날 파비옹에서 열린 '샹젤리제, 과거와 전망' 전
저 멀리 보이는 개선문을 향해 이어지는 넓은 차도와 그 양옆으로 늘어선 가로수길, 각양각색 상점들과 관광객들로 붐비는 거리. 파리를 밖에서 바라보는 이방인이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샹젤리제 거리의 모습이다. 샹젤리제라는 이름부터 낭만의 도시 파리에 대한 환상을 충족시키기에 제격이다. 그러나 개선문에서 시작해 콩코드 광장까지 무려 2킬로미터 이상 이어지는 이 대로는 환상을 뛰어넘어 훨씬 다층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낭만이 넘치는 환상 속 거리가 아닌 실제 삶의 공간으로서 샹젤리제는 어떤 공간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한 전시에서 속속들이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아스날 파비옹Pavillon de l’Arsenal에서 열린 '샹젤리제, 과거와 전망Champs-Élysées, Histoire & Perspectives' 전이었다.
파리 동쪽, 바스티유 광장과 센강 사이에 자리 잡은 아스날 파비옹은 1989년 문을 연 이래 파리 도시건축을 연구하고 대중에게 이를 널리 알리는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파사드를 이루는 아치형 창이 상징이기도 한 파비옹은 유리로 된 천장까지 훤히 트인 내부 구조를 가지고 있다. 이 널따란 공간에서 아스날 파비옹은 다양한 주제를 통해 도시와 건축을 소개하는 전시회를 열기도 하고 도시건축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컨퍼런스를 열기도 한다. 모든 프로그램은 별도 입장료 없이 대중에게 개방된다. 2020년에 열린 '샹젤리제' 전은 샹젤리제 거리의 과거부터 시작해 거리에 대한 다각적 분석과 미래를 위한 비전을 소개했다. 전시의 시작에는 샹젤리제에 자리 잡은 상인들이 만든 협회가 있었다. 너무나 복잡해진 거리가 시민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자 협회는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현실 속 샹젤리제는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은 모양이었다.
협회의 의뢰를 받은 전문가들은 거리를 다양한 시각으로 분석했다. 교통 흐름, 소음, 온도, 대기 오염, 관광객과 거주자들이 머무르는 장소, 파리 평균 대비 땅값, 토지 용도, 주차장 위치, 지하철 경로 등등. 한눈에 알아보기 쉽게 지도 위에 명료히 드러난 분석 결과가 액자 안에 전시됐다. 길을 걸을 때는 느끼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었던 세세한 정보가 쏟아졌다. 제일 시끄러운 곳은 어디인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불편할지, 내가 갔었던 거리의 공기는 얼마나 나빴는지 등등. 과학적 통계와 조사로 이루어진 연구가 환상 속 샹젤리제를 냉큼 현실로 데려왔다. 전시가 특히 주목했던 것은 환경 문제였다. 이들의 지대한 관심을 여실히 드러내듯이 지구 생태계를 광범위하게 분석한 도표는 벽 하나를 가득 채울 정도로 크게 인쇄되어 걸려 있었다. 또한 전시는 상점과 관광객이 몰려있는 개선문 쪽 거리와 방문 빈도가 현저히 낮은 공원들이 들어찬 콩코드 광장 쪽 거리를 나누어 분석했다. 각각 하이퍼 장소Hyper Lieu와 하이퍼 공백Hyper Vide으로 이름 붙은 두 장소가 보여주는 극명한 대비를 통해 거리의 문제가 단번에 드러났다. 전시를 둘러보며 샹젤리제가 과학의 칼날에 발가벗겨져 그 민낯을 드러내는 듯했다. 그러나 이 모습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샹젤리제는 더 이상 손에 잡히지 않는 환상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열린 공간이었다.
그다음으로는 다양한 분석을 통해 한결 가까이 다가온 샹젤리제가 2030년에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면 좋을지를 보여주는 영상들이 이어졌다. 모니터 화면에는 오늘날 거리를 차지하고 있는 활동들이 미래에는 어떠한 비율과 어떠한 방향으로 바뀔 것인지를 보여주는 그래프가 나왔다. 간추리자면 2030년 샹젤리제는 차도가 현저히 줄고 보행자가 접근할 수 있는 공간이 늘어나 시민들이 쇼핑뿐 아니라 문화 활동과 휴식을 즐길 수 있는 거리가 되었다. 이어서 재정비된 도로에 따라 변화된 교통 흐름과 줄어든 차도만큼 늘어난 인도를 보여주는 단면도가 현실적인 실행 방안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으로 새로이 태어난 샹젤리제 거리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실현되어 관람객의 이해를 도왔다. 푸르른 나무 아래에서 거리를 가득 메운 시민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거리보다는 공원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전시의 마지막에는 방문객들이 샹젤리제의 미래에 대해 의견을 남길 수 있는 사이트에 연결된 태블릿 PC가 여럿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벽면에는 전시에 대한 부차적인 설명이 3가지 질문으로 정리되어 쓰여있었다. '결론은 무엇인가?', '어떻게 공유할까?', '어떻게 자금을 마련할까?'
세 질문 아래에 적힌 대답은 전시의 목적과 샹젤리제 프로젝트의 방향성을 명확히 설명하고 있었다. 전시회에 소개된 연구와 분석은 샹젤리제 재개발을 위한 첫 번째 과정일 뿐이다. 그들이 전시에서 보여준 제안은 후에 더 많은 이들의 의견을 모으고 또 변해가는 사회에 맞추어 발전할 가능성을 지닌 초안일 뿐이다. 그리고 이들은 도시의 변화를 위한 결정은 위에서 이루어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한다. 자금 문제 역시 같은 맥락으로 공적 자금에만 의존할 수 없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도시는 공공을 위해 열린 장소인만큼 모두가 동의하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그 변화에 대해 모두가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연구를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함께 발전시키기 위해 전시라는 매체를 빌린 것이다. 전시회를 방문한 사람들은 그들이 익히 알고 있을 샹젤리제를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고 전시에서 제시한 2030년 샹젤리제의 모습에 대해서도 생각할 것이다. 그것이 어떤 생각이든 그들에게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전시의 역할은 충분하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 한 분이 샹젤리제 거리를 찍은 사진에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한참을 쳐다보고 계셨다. 그날 저녁, 할머니가 식사 자리에서 가족들에게 전시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파리가 삶의 터전인 그들은 상상이 아닌 구상을 하며 도시의 미래를 꿈꿀 테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