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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Jun 16. 2023

교황의 성을 가득 채운 축제의 열기

프랑스 아비뇽 축제

아비뇽 축제(Le Festival d’Avignon). 매해 여름 프랑스 남부 도시 아비뇽에서 열리는 축제의 이름이다. 언제 처음 이 이름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오래전부터 이 축제가 세계적으로 명성이 자자한 연극 축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어떠한 수식어 없이 오로지 도시 이름만을 사용한 축제의 이름을 보며 이들의 자부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아비뇽은 교황청이라는 역사 유산과 함께 아비뇽 축제라는 문화 행사로 한 번 더 명성을 떨치며 알만 한 사람은 모두 아는 세계적인 도시가 되었다. 아비뇽의 인구가 10만이 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하면 꽤나 인상적인 명성이 아닌가 싶다. 아비뇽은 인구뿐 아니라 도시의 규모도 크지 않다. 더욱이 4,3km에 이르는 성벽이 도심을 둘러싸 도시의 중심과 외곽이 극명히 나뉘는 독특한 도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아비뇽축제는 로마시대부터 도시를 지키던 이 성벽 안에서 이루어진다.  

맑은 하늘에 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 오전, 아비뇽 중앙역에 도착했다. 기차에서부터 연극포스터를 들고 홍보티셔츠를 입은 사람들 덕에 축제의 설렘을 일찍이 느낄 수 있었다. 기차역 정면에 길게 펼쳐진 대로는 이미 축제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차량이 통제된 길을 가득 메운 사람들과 빈틈없이 도시 곳곳을 빽빽이 채운 공연 포스터들이 단번에 축제의 현장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인파와 함께 바람을 헤치며 한껏 들뜬 마음으로 여행안내소를 찾아가 간략히 축제에 대한 안내를 받았다. 아비뇽축제는 공식 초청한 작품으로 이루어진 아비뇽 인(IN)과 수백 개의 극단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만드는 아비뇽 오프(OFF)로 나뉜다. 아비뇽 인 프로그램은 올해 138개의 공연 및 영화, 애니메이션이 선정되어 29개의 다양한 공연장에서 선을 보였다. 이 중 교황청 안뜰을 사용한 공연장은 아비뇽축제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라고 할 수 있다. 1947년 장 빌라(Jean Vilar)가 아비뇽축제의 첫 돌을 쌓으며 공연을 올린 곳이 바로 이곳이기 때문이다. 아비뇽축제는 아비뇽을 대표하는 역사 유적지인 이 교황청에서 시작됐다.  처음 17년 동안 아비뇽 축제에서는 장 빌라를 중심으로 젊은 배우들이 모여 매해 여름 교황청 안뜰에서 새로운 공연을 소개했다. 이러한 행사는 곧 파리 중심의 공연 문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뜻을 가진 공연계 사람들이 모이는 일종의 만남의 장이 되었다. 그 후 여러 뜻깊은 인사들이 모여 축제는 명성을 높여 갔고, 70년대에 이르러 장외 축제인 아비뇽 오프를 만들며 국제적 규모의 축제로 커나갔다. 오늘날 아비뇽축제는 교황청뿐 아니라 도심의 역사 유적지, 교회, 창고, 레스토랑 등 도시 전체를 극장으로 변화시키며 프랑스어권 연극 문화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축제의 성공에는 연극의 대중화를 위해 애쓴 인사들의 역할이 컸겠지만 지금의 아비뇽축제를 이끌어 가는 힘은 아비뇽 오프에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올해 약 1000여 개의 팀이 참여한 오프는 공식프로그램인 인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로 축제를 빈틈없이 채웠다. 축제 중 아비뇽 곳곳에서 공연 포스터가 덕지덕지 붙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골목길의 한 면을 가득 채운 포스터, 허공을 가로지르며 벽과 벽을 잇듯이 연결된 포스터, 전봇대를 감싸고 있는 포스터, 카페와 레스토랑의 유리창에 붙은 포스터 등등. 온 도시가 포스터 천국이다. 수많은 공연 사이에서 관객들을 끌기 위한 그들의 노력인 셈이다. 이뿐 아니라 골목골목을 오가며 직접 발로 뛰는 극단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들은 놀이공원 퍼레이드에서 볼 법한 옷들을 입고 돌아다니거나 귀여운 티셔츠를 맞추어 입고 노래를 부르며 행진하기도 한다. 즉석에서 퍼포먼스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이들도 있다. 덕분에 도시는 밤늦은 시간까지 축제의 활기로 가득 찬다. 이 많은 극단들을 모두 수용하기 위해 도시 전체가 극장으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축제 기간 동안 관객이 앉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극장으로 탈바꿈한다. 좁은 골목들이 복잡하게  얽힌 아비뇽에서 곳곳에 숨은 극장을 찾아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라고 할 수 있다. 몇몇 극장은 입구에 음료대를 마련해 즉석에서 차린 카페로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도 한다. 또한 도시 한편에 마련된 빌라주 오프(Village du OFF)에서는 간단한 요기거리와 함께 오프 공연 정보와 소개, 오프에서 마련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나볼 수 있다. 올해는 컨퍼런스, 토론회, 아뜰리에, 콘서트 등이 빌라주를 틈틈이 채웠다. 그중 인터내셔널 프로젝트 개발을 위한 아뜰리에가 나의 관심을 끌었다. 빌라주 오프가 마련된 건물의 한 작은 방에서 유럽 곳곳에서 인터내셔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올리비에와 세르지오가 참가자들을 맞아주었다. 주로 극단의 홍보마케팅 담당자들이 참여한 아뜰리에는 문화가 다른 외국에 효과적으로 공연을 홍보할 수 있는 짧지만 강렬한 소개문을 작성하는 시간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유럽의 여러 공연 마켓들에 대해 소개하며 끝을 맺었다. 아뜰리에는 프랑스보다 더 넓은 마켓을 바라보는 극단을 위해 개설된 것이지만 사실 아비뇽축제가 국제적 축제를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이 연극의 대중화였던 것처럼 국제적 마켓을 표방하기보다는 프랑스 언어권 연극들이 모여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또 축제를 찾은 관람객들이 공연을 즐기는 말 그대로의 ‘축제’이다. 

아비뇽축제의 인상 깊은 점은 도시 전체가 축제로 물들었다는 점과 다양한 연령대가 축제를 즐긴다는 점이었다. 막 걸음마를 뗀 아이의 손을 잡고 공연을 기다리는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신이 나 거리 공연을 즐기는 어린 학생들, 손을 꼭 잡고 거리를 산책하는 노부부 등 다양한 관객들이 도시와 극장을 가득 메웠다. 물론 다양한 관객들만큼이나 다양한 공연들이 그들의 기대를 채워주고 있었다. 보통 자리가 지정되지 않은 공연들은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 극장 앞에서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며 기다리기도 하고, 인기가 많아 매진된 공연들은 예약이 취소된 표라도 구할 수 있을까 공연 직전까지 매표소 앞에 줄을 서 기다리기도 한다. 특히 아비뇽 인 프로그램의 마지막 공연인 ‘검은 여인 (Femme noire)’은 그 인기가 대단했다. 축제의 메인공연장인 교황청 안뜰에서 이틀에 걸쳐 공연된 이 연극은 저녁 10시 시작이라는 늦은 시간에도 불구하고 전석 매진이었다. 그럼에도 취소된 표라도 구하려는 사람들이 한 시간 전부터 매표소 앞에 줄을 섰다. 뒤늦게 공연의 인기를 알게 된 나 역시 그 줄에 서 초조함을 달래며 긴 시간을 기다렸다. 광장 앞에 우뚝 솟은 하얀 건물의 교황청은 저녁이 되자 조명으로 은은하게 빛났고 그 앞에는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섰다. 중세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저음의 나팔소리가 공연 시작 30분 전을 알렸다. 교황청의 웅장한 모습과 나팔소리가 섞이니 그 풍경이 을씨년스럽기도 하고 옛날 쓸쓸한 교황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교황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성 앞에 모인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잠시 해보았다.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고 10시가 되어서야 겨우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곧 시작되는 공연을 놓치지 않기 위해 잰걸음으로 철제 계단을 올랐다. 철제 간이 구조물이 층층이 객석을 만들어 교황청 안뜰을 극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계단의 끝까지 올라 자리에 앉자 바로 공연이 시작됐다. 어둑어둑해져 짙은 남색으로 물든 하늘에 낡은 교황청 건물의 벽이 어우러져 별다른 무대 장식 없이도 멋진 무대를 만들어냈다. 잔잔한 기타 반주로 시작한 공연은 줄곧 조용히 시를 읊는 남자의 대사와 아프리카 전통 음악을 부르는 여자의 솔로로 이루어졌다. 극이 진행될수록 밤은 점점 깊어갔고 살랑살랑 밤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은 무대 위 배우의 알록달록한 전통의상을 나풀대며 공연에 정취를 더했다. 공연이 끝나자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고 그렇게 아비뇽의 공식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다.

아비뇽 인 프로그램은 ‘검은 여인’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지만 그 후로도 사흘간 더 이어진 오프 프로그램으로 도시는 축제를 계속했다. 거리는 극단들의 재기 넘치는 퍼포먼스를 가장한 홍보 활동으로 시끌했고 극장 앞은 관객들로 북적거렸다. 이렇게 매년 여름 아비뇽 성벽 안은 연극인들과 관객들의 뜨거운 열정으로 가득 찼다. 몇백 년 전 쫓겨나다시피 아비뇽에 자리를 잡은 교황청은 오늘날 프랑스 공연계를 대표하는 문화의 장으로 거듭났다. 하얀 성벽이 도심을 감싸고 교황청을 감싸듯 더운 여름날 축제를 즐기는 모든 이들의 열정을 감싸며 프랑스 공연계의 안녕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https://cjculture.org)의 해외통신원 활동을 위해 2016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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