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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Jun 12. 2023

도시를 기억하는 프랑스의 새로운 방법

페트 드 뤼미에르 (Fête de Lumière)

지난 봄, 파리에서 멀지 않은 샤르트르(Chartres)라는 작은 도시를 방문했다. 연휴가 낀 긴 주말을 맞아 친구네 집에 초대를 받았다. 샤르트르가 정확히 어디에 있고 규모는 어떠하며 무엇이 유명한지 어떤 정보도 없이 친구를 믿고 무작정 기차를 탔다. 기차역으로 마중 나온 친구는 집에 가는 길에 도시에 대해 짧게 설명해주었다. 도시 한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과 성당 안의 스테인드글라스 덕에 샤르트르 블루라는 색이 유명하며 핫초코와 마카롱을 꼭 맛보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내게 친구는 오늘 저녁 빛 축제를 보면 잘 알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가 지자 밤 산책을 위해 옷을 두껍게 껴입고 집을 나섰다. 집이 시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터라 바로 축제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제일 처음 본 곳은 시립극장이었다. 극장 외부 벽면을 가득 채운 프로젝트가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영상들을 보여줬다. 이어서 미디어테크, 교회, 대성당, 미술관 등 샤르트르의 역사를 함께해 온 건물들이 아름다운 빛과 색으로 물들었다. 한낮에 고요했던 도시는 금세 사람들로 붐볐다. 특별한 축제 행사가 마련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밤하늘 아래서 각자 자리를 잡고 영상을 감상했다. 영상은 오래된 건물의 아름다움을 새삼 강조하기도 하고 밤하늘과 조화시키도 하며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친구가 설명하기를 영상은 각 건물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라고 한다. 듣고 보니 마치 오랜 역사를 지닌 건물이 우리에게 말을 거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낮에는 그저 오래되어 보이는 양식의 평범해 보이던 건물이 새롭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프랑스 서쪽에 위치한 르망 역시 매년 여름 빛을 이용해 도시의 유적지를 밝힌다. 키메라의 밤(La Nuit des Chimères)이라는 이름으로 열리는 행사 기간동안 르망을 대표하는 생줄리앙 대성당을 포함해 중세의 모습을 간직한 구시가지 7곳이 대형 스크린으로 변한다. 관람객들은 구시가지를 산책하며 차례대로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영상은 각 장소의 의미와 역사를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여정은 구시가지 초입에 거대하게 솟아있는 대성당의 뒷편에서부터 시작한다. 대성당의 후면부는 여러 개의 아치와 첨탑이 얽혀 고딕양식의 진수를 보여주는 생줄리앙 대성당만의 특징이다. 이 입체적인 구조물은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하늘로 바뀌어 웅장한 음악과 함께 신을 향한 중세 유럽인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아치형의 기둥과 스테인드글라스의 창살과 어우러지는 이미지를 통해 대성당은 더욱 엄숙한 예술 작품이 된다. 대성당의 웅장한 위엄 다음으로는 그 발치에 놓인 분수대에서 중세시대 상상의 창조물인 키메라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그리고 분수대 양 옆에 놓인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드디어 구시가지에 들어선다. 유네스코 등록을 준비 중인 구시가지는 로마시대 때 지어진 성벽과 중세시대의 건물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르망의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때문에 구시가지에는 역사적인 장소가 곳곳에 숨어있는데 키메라의 밤은 이 보물같은 장소들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대성당의 입구를 따라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47명의 음악의 천사들이 그려진 예배당이 있다. 키메라의 밤의 3번째 장소인 예배당은 천사들의 연주와 함께 다양한 색들로 빛을 발한다. 이곳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를 통해 중세시대의 악기에 대해 연구할 수 있었다는 설명은 안내 책자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로마시대 때 지어진 성벽에서는 중세 신화에서 나오는 신비로운 창조물과 성벽의 역사를 짧게 볼 수 있다. 로마와 중세를 함께 만날 수 있는 구시가지의 특징을 살린 영상이었다. 커다란 성벽을 가득 채운 영상은 어느 무대에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했다. 긴 성벽을 지나 이어지는 장소는 지금은 음악학교로 쓰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호텔 건물이다. 메디치가의 왕비가 묵었었다는 유서깊은 호텔답게 왕족의 연회가 이 곳의 테마이다. 연회장을 찾은 왕과 왕비, 기사와 요정들이 약 1시간에 걸쳐 옛날 이야기를 보여준다. 마지막 장소는 잉글랜드 왕국의 왕비가 소유했던 저택으로 그녀의 하이얀 유령이 관람객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낮에 미술관으로 방문했던 저택이 밤이 되자 시간을 되돌아가 왕비의 저택으로 돌아간 인상이었다. 역사적 이야기가 있는 장소에서 그와 관련된 영상을 보고 듣는 것은 어느 책을 통해 배우는 역사보다 훨씬 생동감 넘쳤다. 평소 무심코 지나쳤을 장소들이 여름의 까만 밤하늘 아래서 말그대로 빛을 발하는 시간이었다. 이 장소들은 매년 관람객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의미와 역사를 더해갈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빛 축제는 프랑스 전역에서, 나아가 세계 곳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축제가 되었다. 도시의 문화 유적을 새로운 기술로 재조명할 수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하지만 빛 축제의 시작은 새로운 기술이 아니었다. 빛축제의 선두주자격인 리옹 빛축제의 시작은 무려 18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리옹 교구는 대성당이 있는 푸르비에르 언덕 꼭대기에 영적 계시가 될 수 있는 조각상을 세우고 싶어했다. 공모전으로 조각가가 선발이 되고 1852년 12월 8일, 드디어 제막식을 열게 되었다. 하지만 신중히 날짜를 골랐음에도 불구하고 날씨가 너무나 거칠었다. 결국 행사를 취소하려던 때 마침 하늘이 맑게 개기 시작했다. 이에 감격한 리옹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각자의 집 창가에 촛불을 켜놓고 제막식을 축하했다. 날이 저물자 도시는 창가에 켜진 촛불로 밝게 빛이 났고 주교 역시 촛불로 대성당을 밝혔다. 오늘날 리옹을 빛의 도시로 만든 축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축제는 다양한 조명으로 화려하게 채워졌고 점점 그 규모를 키워나갔다. 이제는 나흘에 걸쳐 100만명이 넘는 관객들이 빛축제를 찾고 있다. 작년 빛축제에는 41개의 프로젝트가 도시 곳곳에서 진행됐다. 축제의 시작이었던 푸르비에르 언덕은 물론이고 문화유적지와 도심 곳곳을 화려한 영상들이 수놓았다. 뿐만 아니라 색색의 조명으로 만든 장식들과 빛을 이용한 설치미술 작품들이 도시를 채웠다. 빛과 도시와 예술이 만나 어두운 밤을 환하게 비추는 축제의 모습이다. 또한 오늘날의 축제는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과제에 당면해 있는데 바로 지속가능한 방법으로 환경을 존중하는 축제가 되는 것이다. 조명을 켜는 시간, 사용하는 재료, 에너지 소비율부터 시작해 그림자도 빛축제의 일부로 고려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환경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시민들의 종교적 열정으로 도시를 밝게 비추던 축제는 이제 세계적 규모가 되어 세계인의 마음을 밝히고 있다. 올해 12월 7일부터 10일까지 열리는 빛축제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할지 기대가 된다.


앞서 말했듯 르망과 리옹 뿐 아니라 프랑스의 여러 도시가 빛축제로 도시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리옹처럼 빛이라는 소재로 도시 전체를 예술 작품으로 만드는 축제가 있는가 하면, 르망과 같이 빛을 이용해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새롭게 조명하는 축제도 있다. 전자가 일반적 의미의 축제라면 후자는 축제라는 형태를 차용한 도시의 아카이브 내지는 관광 상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후자가 흥미로운 것은 자칫 평범한 건물과 별반 다를 게 없었을 유적지를 새롭게 재탄생시킨다는 것이다. 빛축제의 진정한 의미는 현대의 기술로 오랜 세월 머물러있던 도시의 역사와 가치를 되새기며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https://cjculture.org)의 해외통신원 활동을 위해 2017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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