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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아 May 31. 2023

시간처럼 흘러가는 특별한 공간을 만나다

낭뜨의 리유 유니끄 (Lieu Unique)

프랑스 지도를 들여다보면 테두리를 따라서 육각형을 그릴 수 있는데, 덕분에 프랑스 본토는 종종 헥사곤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 육각형 왼쪽 모서리에는 서프랑스 문화의 중심인 낭뜨(Nantes)라는 도시가 자리 잡고 있다. 세계사 시간에 배운 낭뜨칙령으로도 익숙한 이 도시는 오래전부터 프랑스 역사에 등장해 오늘날 프랑스에서 중요한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유산과 함께 오늘날에는 서프랑스를 아우르는 메트로폴리스로 거듭나고 있다. 이러한 낭뜨의 성장에는 문화 예술이 큰 몫을 하고 있다. 다양하고 활발한 문화 움직임과 지자체의 아낌없는 지원으로 낭뜨는 그 명성을 높이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흐릿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널찍한 루아르강을 중심으로 펼쳐진 낭뜨 도심을 보며 왜인지 모를 생동감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낭뜨에 처음 도착했을 때는 그 인상이 그리 좋지는 않았었다. 처음 기차역을 나서며 눈앞에 펼쳐진 조금은 황량한 풍경에 적잖게 당황했었던 기억이 난다. 서울역이나 파리 몽빠르나스역에서 볼 수 있는 높다란 건물과 북적북적한 인파들로 고정되어 있던 메트로폴리스에 대한 편견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나의 기대를 다시 되찾기를 바라며 서둘러 지도를 꺼내 중심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잰걸음으로 서두르던 중 단숨에 나의 호기심을 사로잡은 건물과 마주쳤는데 하늘색과 분홍색이 더해진 아기자기한 장식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 건물이었다. 도심과 기차역 중간에 놓인 그 건물은 특별한 장소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리유유니끄(Lieu Unique)라는 문화공간이었다. 리유유니끄를 시작으로 점점 낭뜨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이 도시의 진면모를 볼 수 있었다. 곧이어 오른편에 나타난 브르타뉴 공작 성부터 왼편에 넓게 펼쳐진 루아르 강변,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중심지, 그리고 거대한 기계 코끼리가 살고 있는 테마파크까지 온 도시가 나의 호기심을 잔뜩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도시 곳곳에는 각종 전시회, 콘서트, 이벤트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여기저기 들려보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았다. 이후로도 낭뜨를 여러 번 찾아올 것 같은 예감과 함께 아쉬운 마음으로 첫 번째 낭뜨 방문을 마쳤다.


그 후로도 낭뜨를 여러 번 찾았다. 대부분이 문화행사 때문이었는데, 매번 기차역 바로 옆에 있는 리유유니끄를 들렸다. 식사를 하러 가기도 하고, 기차 시간이 남을 때는 안에 있는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기도 했다. 펍으로 바뀐 카페에서 술을 마시러 갈 때에는 입구에 있는 홀에서 디제이셋과 함께 흥겨운 댄스파티가 열리기도 했다. 리유유니끄는 알수록 재미있는 장소였다. 우선 그 역사부터 흥미롭다. 아기자기함과 빈티지함이 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건물은 프랑스 국민 과자 브랜드인 LU의 옛 과자공장이었다고 한다. LU의 이름을 따서 리유유니끄(Lieu Unique)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소소한 여담도 가지고 있다. 1886년에 세워진 LU 과자공장은 1974년부터 점차적으로 폐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공장의 일부 공간들이 문화 공간으로 사용되기 시작해 1994년 현대 예술을 위한 레잘뤼메 페스티벌 (Festival Les Allumées)이 리유유니끄에서 열리기도 했다. 변화의 중심에는 문화발전연구센터(Centre de Recherche pour le Développement Culturel)와 낭뜨국립무대예술협회(Scène nationale de Nantes)가 있었다. 레잘뤼메 페스티벌 이후 문화발전연구센터장이었던 쟝 블레즈는 본격적으로 과자공장을 문화공간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1995년 낭뜨시의 지원과 함께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예술을 만날 수 있는 문화 공간을 목표로 한 리유유니끄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우선 문화 공간에 어울리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건물을 개조하기 시작했다. 이때에 과자공장의 아이덴티티를 지키며 옛 건물과 새로운 건물이 조화를 이루는데 중점을 두었다고 한다. 리유유니끄라는 이름에 걸맞은 유니크한 아이덴티티는 여기서부터 나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1999년 12월 30일, 세기말 페스티벌 (Festival Fin de Siècle)과 함께 드디어 리유유니끄의 개관식이 열렸다. 개관식은 사진, 인형, 연애편지, 핸드폰 등 12000여 명에 다다르는 시민들의 물건을 담은 타임캡슐을 건물 내벽에 숨겨 놓는 행사로 그 시작을 알렸다. 이 타임캡슐은 2100년 1월 1일 17시에 개봉된다. 그 시작부터 시민들의 일상을 품고 있어서인지 오늘날 리유유니끄는 시민들의 일상에 깊이 녹아들었다.

과자공장 때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탑은 리유유니끄의 상징이 되었다. 아기자기한 장식물에 분홍색 하늘색 칠이 더해져 아르누보 형식으로 지어졌다는 설명이 무색하지 않은 예쁘장한 외관이었다. 하지만 탑을 돌아 건물의 옆면으로 가면 리유유니끄의 또 다른 모습을 만나게 된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낡은 외벽과 그 벽을 감싸듯 내려오는 투박한 철제계단,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유난히 또렷해보이는 네온사인 간판들이 빈티지함과 모던함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조금 전 보았던 탑과는 상반되는 모습이지만 또 어색하지는 않은 묘한 조화였다. 건물의 외관을 짧게 감상하고 앙트레(입구)라고 적힌 네온사인 밑에 회전문을 열고 들어섰다. 외관은 시작일 뿐이었다는 듯이 내부는 훨씬 더 인상적이었다. 허름해질 대로 허름해진 벽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구조물과 세련된 장식들이 홀을 메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조화로워 아늑한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했다. 들어서자마자 정면에는 진행중인 전시회의 입구가 있었고, 오른편으로는 매표소와 서점이, 왼편으로는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홀을 몇 개의 편의 시설들이 알차게 나누어 쓰고 있었다.  


리유유니끄의 중요한 컨셉은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있는 복합 문화 공간이다. 그래서 문화행사를 위한 공간  말고도 바, 레스토랑, 서점, 탁아소, 사우나 등 다양한 편의 시설을 갖추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들은 사람들이 리유유니끄로 쉽게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기회가 되고, 이것이 자연스레 문화와의 만남으로 이어진다. 서점에 들렀다 전시를 보기도 하고, 전시를 보다가 카페에 들어가 쉬기도 한다. 이 시설들에서 주목할 점은 각각이 독립적으로 운영되어 부담 없이 접할 수 있지만 또 이들이 유기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극장에 속해 있는 카페도 아니고, 전시회와 관련된 서점도 아니다. 하지만 한 공간에 모여 서로가 서로의 접근성과 활용도를 높이고 있다. 이렇게 유연한 공간 운영은 리유유니끄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여기에 장르를 아우르는 다양한 문화행사가 더해져 리유유니끄는 더욱 특별해진다. 지난 20여 년 동안 리유유니끄에는 건축, 미술, 음악, 무용, 문학, 철학 등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아티스트들이 다녀갔다. 공연, 전시회, 컨퍼런스, 토론, 아뜰리에 등으로 행사의 종류도 다양하다. 리유유니끄의 프로그램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1년 단위로 프로그램이 짜이는 유료 프로그램과 4개월 단위로 시즌이 나뉘는 무료 프로그램이다. 유료 프로그램은 일반적인 극장, 전시장과 마찬가지로 시즌 초에 한 해의 프로그램이 나오고 회마다 티켓을 구매하거나 연회원으로 가입해 이용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무료 프로그램은 라보유띨(Labo Utile)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된다. 라보유띨은 문화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대중과 예술의 연결고리 역할을 자처한다. 예술뿐 아니라 사회, 과학을 아우르는 학술적 분야까지 대중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열린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이 세상과 소통하는 문을 열어주는 것이 리유유니끄의 순기능이 아닌가 싶다. 일상 속에 예술과 문화가 스며들어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기차역과 시내 가운데에 위치해 있는 리유유니끄는 낭뜨를 잠시 들리는 방문자에게도, 낭뜨 시민들에게도 그 이름답게 특별한 장소를 제공한다. 바로 앞에 놓인 기찻길과 루아르강에서 뻗어 나온 작은 시내 같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모여 특별함을 자아낸다. 뿐만 아니라 옛 것과 새것이 모여 현재를 만들고, 그 현재는 과거를 담은 캡슐을 안고 미래를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적접적으로 느낄 수 있는 시간의 흐름 덕분에 리유유니끄는 또 특별하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처럼 이곳을 오고 가는 사람들로 인해 리유유니끄는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한다. 그들이 불어넣은 생명력이 또 특별하다. 이처럼 리유유니끄는 참으로 특별한 장소가 아닌가 싶다.



*청주시문화산업진흥재단(https://cjculture.org)의 해외통신원 활동을 위해 2017년에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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