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민아 Aug 13. 2021

여름의 아쉬움과 가을의 설렘
그 사이

입추와 말복

    

    나와 이도에게는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우리만의 놀이터가 있다. 놀거리, 먹거리가 다양하고 무엇보다 이 시국에 안전한 곳이기에 우리 가족은 이곳을 즐겨 찾는다. 그리고 누구보다 애정 한다.


    그 놀이터의 공식 명칭은 ‘수련 농장’. 농장 안쪽 연못에 통통하게 피어 있는 연꽃이 참 매력적인 이곳은 흑룡검(친정 아버지)님이 수련(친정 엄마)님을 절절히 사랑하여 가꾸신 농장이다.(그런 전설이 있다) 친정아버지는 이도가 태어나기 전부터 600평이 넘는 이곳을 일구시고 가꾸셨다. 매일 퇴근길 이곳에 들리셔서 농장 식구들(닭과 개) 밥을 챙기고, 그 날의 농작물(유정란과 나물 등)을 조금씩 수확하시고 귀가하신다. 주변 지인들은 친정아버지가 귀농을 하셨거나 아니면 원래 내가 파주 토박이 시골 출신인 줄 알지만, 놀랍게도 아버지는 이 어마 무시한 농장을 투잡으로 운영하고 계신다. 낮에는 의약품 유통회사의 전무님으로, 저녁에는 수련 농장 주인으로 낮과 밤이 다른 삶을 살고 계신다.

    물론 수련 농장이 나날이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친정 엄마의 바지런함과 부지런함이 팔 할이었다. 엄마는 이곳에서 장도 담고, 막걸리도 담고, 장아찌도 담고, 김장도 담고 온-갖 정성을 담그시면서 자식들 손주들 친환경 먹거리를 챙기신다.


수련 농장 연꽃_연잎에 물방울을 토르륵 떨어트리면 은구슬이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그리고 이도에게 동요를 개사해서 맛깔지게 불러준다. 쏭알쏭알이라는 의성어를 시각으로 느낄 수 있다.



    우리 가족은 최소 한 달에 두 번 이상 이 놀이터를 찾는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계절의 변화를 제일 먼저 느낀다. 계절에 맞는 제철 음식을 먹고 계절에 어울리는 놀이를 하며, 지금의 계절을 먹고 마시고 느낀다. 

2021년의 입추. 그리고 곧 다가올 말복. 24절기와 세시풍속을 동시에 기념하여 아버지는 새벽부터 빨간 고추를 따시고, 장닭을 잡으셨다. 벌써 고추 걷이를 하는 거 보니 정말 코 밑이 시큼한 가을 바람 냄새가 난다.(지르텍을 더 사놔야겠다) 그 가을바람 사이로 고농축 고단백질의 냄새가 난다. 닭이 익고 있다. 몇 주전 나와 이도가 "꼬꼬야, 잘 먹고 무럭무럭 자라라"하면서 모이를 던져주었는데, 절대 오늘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했던 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나와 이도는 여전히 뜨거운 여름 태양 아래, 산산한 가을바람 내음을 맡으며 원기를 보충했다.


“도야. 엄마가 외출할 때 바르는 립스틱 색깔보다 더 빨갛다. 그치?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선명한 빨간색이야.” /  “응, 엄마. 빨갛게 매워.”



    배불리 먹었으니, 신나게 놀아줘야 한다. 물놀이가 별거냐. 그저 뜨거운 태양 아래 시원한 물속에 들어가서 노는 게 물놀이이거늘. 삐까뻔쩍한 호텔 수영장도 아니고 비비드한 컬러의 플라밍고 튜브도 없지만, 몸은 더 시원하고 마음은 더 즐거운 이도만의 워터파크가 매년 여름 찾아온다. 먼저, 아버지가 몇 시간 전 미리 받아놓은 지하수가 태양에 달궈져 살짝 미지근한 상태가 되면, 창고에 있던 큰 다라이가 수돗가로 나온다. 그리고 다라이에 따땃한 물을 반쯤 채워, 예쁘게 수영복을 입힌 이도를 집어넣는다. 끝. 이도가 언제까지 다라이 워터파크를 즐길지 모르겠지만, 이도에게 말해주고 싶다. 매년 여름 이 다라이 안에서 햇빛 먹고 건강하게 타면서 조금씩 조금씩 자랐다고.


다라이 워터파크. 아쉽지만 내년 여름엔 졸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신나게 놀았으니, 허기를 채워야 한다. 이도와 외할머니는 소쿠리 하나를 들고 바로 밭에서 참외, 수박, 복숭아를 따온다. 엄마는 외할머니이기 전에 이도의 자연학습 선생님이다. 값비싼 자연과학 전집이 필요 없다. 과일 하나를 따더라도, 과일처럼 탐스럽게 설명하고 가르쳐준다. 이렇게 자라는 이도는 얼마나 잘 영글까. 그리고 온 가족은 평상에 앉아 여름 과일을 먹으며 땀을 닦고 당을 보충한다. 백화점 식품관 과일보다 훨씬 달고 싱싱하고 탐스럽다.


복숭아는 꽃부터 열매까지 요염하다. '도화살'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몸소 눈으로 확인한다.


    농장에서의 시간은 1.5배속이다. 여름치곤 꽤 선선한 바람이 부는 저녁이 되었다. 민감한 사람들은 분명 오늘의 바람만으로도 입추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엄마는 바쁘게 자식들의 짐보따리를 챙기고, 나는 이도의 손을 잡고 농장 한 바퀴를 돈다. "닭들아 안녕, 민탐(농장 경비견)아 안녕, 깻잎아 안녕, 머루야 안녕..." 이도의 말을 빌려 '온 하늘이 주황 나라가 되면' 우리는 농장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미리 한다. 마지막으로 화단의 꽃들에게도 인사를 한다.

   모: "얘네들은 다음에 못 봐. 잘 가~라고 인사해줘야 해."

   도: "왜?"

   모: "여름꽃이니까. 이제 가을이 올 거야"

   도: "괜찮아. 가을꽃도 있으니까. 다음에 또 봐. 꽃들아"



    이도가 오늘 농장에서 보고 느낀 것은 얼마나 무궁무진할까. 이 모든 것들을 오감으로 인지하며 연상시킨 수많은 상상들은 얼마나 기발할까. 채송화의 여리여리함과 백일홍의 강인함과 그리고 접시꽃의 올곧음을 이도도 분명 알 것이다. 계절은 이렇게 또 흐르고, 우리는 또 자란다.


이도와 내가 만든 꽃반지. 여름꽃_채송화와 과꽃






작가의 이전글 콘텐츠 기획자 겸 이도 엄마 재직 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