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민아 Aug 13. 2021

당근은 추억을 싣고

유년기의 나를 우연히 마주하다.

당근!!!!

정말 토끼가 말을 할 수 있다면 이런 목소리를 낼 것 같다. 이 앙칼진 알람이 나를 더 민첩하게 했다.


"엄마, 당근 왔어!"

이도도 안다. 당근은 자신에게 장난감과 책을 가져다주는 곳이며, 엄마는 이 알람 소리에 빛의 속도로 움직인다는 것을.


동화책 전집 마흔아홉 권이 단돈 오천원이라니. 게다가 상태도 좋고, 지금 이도가 읽기에 딱 좋은 글밥과 그림이라니. 부푼 마음으로 거래 채팅을 마쳤고, 책을 받아본 순간 얼어버렸다.




                (애 딸린 유부녀가) 전전 남자 친구를 서울 번화가에서 우연히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책들은_어렸을 때 엄마가 나에게 사준 전집 중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이었다. 책의 표지 삽화만 보고 단번에 알아차렸다. [교원 출판사 월드 픽처북 전집] 1판 1쇄가 1988년 내가 태어났던 해, 마지막 2판 10쇄가 2001년이다. 최소 나이만 스무 해가 넘은 책이다.


아마 짐작컨대 거래하신 분 역시 다른 분의 자녀가 잘 읽지 않을 책을 물려받으셨을 테고, 이 분의 자녀 역시 잘 읽지 않아서 책장에서 책장으로만 고이 보존되어 왔던 책을 싼 값에 판매하신 것 같다. 정말 책에 흠집이나 얼룩조차 없다. 찢어진 페이지도 없었다. 그저 책장에만 꽂혀있어, 책의 테두리에만 먼지가 조금 있을 뿐이다. 


이제는 버젓이 우리집 책장에 있다. 영원히 우리집 책장에 있을 것이다.



남편이 먼지를 한 권씩 닦아 건네주면 나는 꺄아↗ 소리 지르며 호들갑 떨었다. 정말 한 권도 빠짐없이, 한 장도 빠짐없이 다 기억이 났다. 유난히 좋아했던 책은 몇 번이고 펼쳤다 덮었다 하면서 정신 못 차릴 정도의 행복을 느꼈다.


유년기의 나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어린이 조민아가 내 옆에 앉아 늘 그렇듯 구부정한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오래된 책이라서 그런지 약간 빛바랜 부분도 있었고 오래된 책에서 나는 특유의 퀴퀴한 냄새(나프탈렌+나무껍질 향)도 났다. 요즘 유명 출판사에서 나오는 책들처럼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활동 부록이나 세이펜도 없고, 빳빳하고 선명하게 코팅된 페이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도 역시 이 책에 끌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먼저 책을 골라와 평소보다 더 실감 나는 목소리로 읽어주니 말이다. 책의 어투는 영화 나 홀로 집에 2에서 나오는 비둘기 아주머니 목소리다. 어딘가 모르게 수줍지만 따뜻한 목소리. 책의 그림들은 뽀송하게 세탁이 잘 된 아기 침대 이불처럼 포근하다.


어렸을 때 엄마는 이 책의 삽화를 따라 그려주시곤 했다. 
친정 엄마에게 사진 찍어 보냈다. 엄마도 당신의 30대 엄마 시절을 회상하시겠지.


 매일 이도와 자기 전 세 권의 책을 읽는다. 마흔아홉 권이니 보름 안에 책을 다 읽을 듯하다. 어떤 날은 너무 재밌어서 네 권도 읽고 싶지만, 일부러 아껴서 읽고 있다. 내가 봐도 우습고 유치하다. 어린이 조민아가 딱 이랬을 것 같다.


아이를 키우면서 부모는 자신의 유년시절을 돌이켜본다고 한다. 책에 빠져들어 자기도 모르게 입이 살짝 벌어진 이도를 흘깃 보며 오늘도 어린이 조민아를 만난다. 


작가의 이전글 여름의 아쉬움과 가을의 설렘 그 사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