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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을 그립니다 미내 May 08. 2024

안전한 잠

<안전한 잠> 24.2x34.8cm_sharppencil & watercolor on paper_2024 윤미내


기억할 수 없는 아주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엄마를 통해 듣고는 한다. 언어를 배우기 전의 아기들은 배가 고프거나 졸리거나 어딘가 불편할 때. 그 본능적인 해결을 보통 울음으로 알리는데, 나는 배가 고픈지 기저귀를 언제 갈아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울음이나 보챔이 없고 잠만 아주 잘 자는 아기였다고 한다.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할머니와 당시는 결혼 전이었던 세 명의 삼촌들과 함께 대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한 집에서 부모님처럼 나의 보육과 교육을 도왔던 삼촌들도 종종 그 시절을 추억하며 이야기해주는데, 나의 잠에 관한 에피소드를 풀어놓고는 한다. 엎드려서 책을 보는 삼촌의 등 위로 엉금엉금 기어 올라가 그대로 잠이 들거나, 군 휴가를 나온 삼촌의 군화를 베고 잠들기도 하는 그런 아이였다고 말이다.

기억할 수 있는 유년 시절을 되짚어 보아도, 숨바꼭질을 하다가 장롱 안에 숨어 잠들어버렸다거나, 학창 시절 친구와의 전화 통화 중에 나도 모르게 잠들어 버린 기억이 종종 있다.


어린 시절 잠을 아주 잘 잤던 나는 그만큼 꿈이 많기도 하고, 큰 꿈을 꾸는 아이였기도 하다. 꿈 속에서 상상의 날개를 달고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행복한 꿈에 취해 까르르 웃다가 내 웃음소리에 놀라 잠을 깬 적도 있고, 어느 날은 슬픈 꿈 속에서 울다가 엄마가 흔들어 깨워주기도 했던 것 같다. 어디서든 머리만 닿아도 잘 자고, 꿈도 잘 꿨던 그 시절이 새삼 그립다.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어가며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한다. 희미한 불빛에도, 베개의 높이가 평소와 조금만 달라도.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시간이 길다. 잠자리 충분조건의 리스트는 점점 쌓여가고 까다로워만 진다.

어렵게 잠이 들어도 숙면을 하지 못한다. 다른 몸의 기능은 퇴화하고 둔해지는데, 유독 잠귀만 성장하는 건지. 작은 소리에도 쉽게 깨고, 다시 잠들기가 어렵다.

계속 이는 뒤척임에도 다시 잠들지 못하는 날이면, 기억의 공간에서 판도라가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힌다. 잊고 있던 온갖 수치와 좌절의 순간이 한꺼번에 쏟아지기도 하고, 현재의 고민과 걱정의 무게는 두 배가 되어 불쾌한 의무감으로 나를 짓누르고는 한다.       


잠은 일정 시간 동안 몸과 마음의 활동을 쉬는 행위다. 적절한 잠은 우리를 성장하고 회복하게 한다. 그리고 잠을 통해야 꿈도 꿀 수 있다. 꿈은 수면 중에 뇌 일부가 깨어 있는 상태에서 기억이나 정보를 무작위로 자동 재생하는 것이라는데,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는 것은 주로 우리의 일상생활이라고 한다. 어린 시절 잠도 많고 꿈도 많았던 내가, 나이가 들며 일상의 직무에 시달려 잠도 쉬이 이루지 못하고 덩달아 꿈도 사라져 버린 건 아닌지. 왠지 서글픈 마음이 든다.  


누구보다 부지런하고 빠르게 살아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들에게 잠을 줄이고 시간을 쪼개고 쪼개어 자기 계발에 투자해야 한다는 말이 조금은 잔인하게 느껴진다. 건강을 위한 쉼과 회복의 행위, 잠이라는 것이 게으름과 나태함에 연결되는 것이 안타깝다. 건강한 잠을 보장받지 못하는 일상에서는 달콤한 꿈도 꾸지 못할 것이다.


오늘 밤은 현재의 고민과 당면한 내일의 숙제를 내려놓고, 무해하고 안전한 잠을 이룰 수 있기를 꿈꿔본다.



※모든 이미지에는 저작권이 있습니다.

공간을 그릴수 있게 허락해주신 @yunji_yi (인스타그램)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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