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과 휴식을 위해 여행을 한다는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우리는 여행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두뇌를 풀가동해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꼭 해야 할 일정과 맛보아야 할 메뉴 리스트를 작성하고, 여행지에서 필요한 물건을 잊지 않고 챙기기 위해 여러 번 확인하기를 반복한다. MBTI가 J가 아닌 P인 사람일지라도, 최소한 여행지의 날씨에 맞는 의복정도는 체크하여 준비한다.
여행지에서는 모든 게 낯설다. 숙소 안의 가구 배치도 익숙하지 않아서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을 쉽게 찾기가 힘들다. 생소한 침구의 촉감이 숙면을 방해할 때도 있다.
여행 후 여독은 또 어떠한가. 미뤄두었던 일상의 일들을 해결하고 여행 전의 상태로 복구하는 데는 여행기간만큼의 시간과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반(反) 여행주의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행은 ‘일상의 공간과 루틴에서 벗어나 새로운 기운과 경험을 얻기 위한 인간의 이상적 몸부림.’이라고 정의하고 싶을 뿐이다. 적어도 내게는 배움과 도전을 위한 동적 발전기를 가동하는 행위이지, ‘쉼과 휴식’이라는 목적을 충족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진정한 휴식과 쉼은 익숙하고 편안한 나의 공간, 집에 있다. 어차피 매일 돌아가야 하는 곳인데 지겹지 않냐고 묻는다면, 매일 있는 곳이기에 내게 가장 보기 좋고 아껴야 하는 곳이라고 대답하겠다. 혹자는 ‘집순이, 집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말에는 외부 활동을 즐겨하지 않고 집에서 뒹굴거리기를 좋아하는, 조금 게으르다는 부정적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부지런한 집순이임을 당당히 밝히겠다.
책장에 꽂힐 책들의 순서, 거실 바닥의 비율을 고려한 카펫의 위치, 좋아하는 향기의 바디제품이 있는 욕실, 보이지 않는 BGM 볼륨 세기까지도. 모두 내 기호로 채울 수 있다. 가장 오래 머물고, 가장 편한 내 모습을 보이는 곳, 그러기에 전부를 개인적인 취향으로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집이다.
같은 아파트의 같은 평수 집들을 둘러보아도 저마다 다른 공간을 만들어 낸다. 거실에 품질이 좋은 스피커와 LP판들이 진열되어 있는 집은 얼마나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이 살고 있는지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음악을 즐겨 듣는지 궁금하게 한다.
햇빛이 잘 드는 베란다에 초록초록한 화초들이 가득한 집에는 해가 어디에서 들고 어디로 지는지, 그리고 집의 온습도를 세심히 체크할 식물 집사의 마음이 느껴진다.
행여 청결하지 못하고 정돈되지 않은 집을 방문했을 때는 그 사람의 내실이 의심스럽기도 하다. 오래 머물며 휴식을 취하는 집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의 실속이 제대로 채워져 있기는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이처럼 다양한 공간은 각기 다른 사람을 만들어낸다. 어떤 영역 안에 존재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말과 행동, 생각은 변하기 때문이다. 이는 여러 경험과 발견을 통해 각자 자신만의 색다른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나를 둘러싼 공간을 관찰하며 무엇을 더 채워야 하고 어떤 것이 불필요한지 헤아려 본다. 그런 보살핌의 과정 속에서 발견한 충분한 사유와 넉넉한 휴식의 순간을 사랑한다. 유해함이 없는 안전하고 편안한 집에서 내 영역과 역할은 무엇인지, 넓게는 사회 속에서 나는 어떤 범주 안에 속해 있는 지를 고민한다. 그리고 우리는 각자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공간을 만들어 가는 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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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을 그릴 수 있게 허락해 주신 @yunji_yi (인스타그램)님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