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죽음 앞에서 인생의 깨달음을 얻는 것은 고통스럽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평범한 일상에 대해 되돌아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과정일지 모르지만 죄책감이라는 감정을 동반한다. 아직 내게 붙어있는 생명이라는 것이 늘 마땅하다고 여겼지만, 세상을 떠난 이에게는 마지막 한마디, 전하고 싶은 미안함, 간절한 당부의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에 다녀오면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며 한동안 상념에 잠겨 지낸다. 별안간 세상을 떠난 젊은이의 죽음 앞에서 뿐 아니라, 흔히 호상이라 부르는 노인의 죽음 앞에서도 인생이 허무하다는 감정이 든다. 호기로운 삶을 살았들, 죽음의 순간은 어떤 저항조차 통하지 않고 일말의 결정권도 없다. 그런 인간의 무력함이 느껴져서인지 결국 삶이란 것이 텅 비어있는 느낌이다. 고인을 떠나보낸 가족과 문상객들도 죽음 앞에서 애도를 표하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서서히 각자의 삶에 스며들고 죽음의 위세에 적응하고 만다. 이것이 인생이라니, 허탈한 마음이 한동안 사라지지 않는다.
장례식에 돌아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지배하게 되자, 삶에서 무가치한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피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서 언제고, 누구든, 공허하게 사라질 것이라면, 삶에서 무의미한 것들을 빨리 제거하는 것이 덜 허망한 것이 아닐까 궁리해 본다.
후손에게 가치 있고 위대한 유산을 남기는 것이 힘들다면, 적어도 인생에서 무의미한 것들을 하나씩 제거해 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무가치, 무의미한 것들은 부정적인 에너지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지배하려는 마음, 질투,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이다. 부정의 에너지 무게만 덜어내도 인생이 얼마나 가볍게 정리가 될지 생각한다. 죽음의 문턱에서 인간의 나약함을 숨길수야 없겠지만, 삶의 무의미한 것을 버린 정갈한 정신이라면 잠시 기죽지 않을 당당함으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를 깨보려는 행위일지 모른다. 죽음은 인간의 원초적인 두려움을 지배하는 거대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의 마침표인 죽음은 삶의 무가치함을 제거하며 죽음이 주는 인생의 무상함에 대항할 줄은 아마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죽음에게 그런 당혹스러움을 전하는 것만으로도 계획이 절반은 성공한 셈이다. 조금 더 과감하고 담대하게 삶에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며 죽음을 향해 걸어가 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