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걸 좋아해
누구나 그러하듯 치열한 10대, 20대를 보냈다. 대학입시를 앞에 두고, 매일 공부할 분량을 다이어리에 빼곡하게 써두고 체크하며 하루하루를 보냈고, 시험 기간에도 과목별 분량을 매일 나눠가며 2회독, 3회독 목표를 향해 달렸다. 그런 노력 덕에 목표하던 대학에 갔고, 회사에 취직했고, 대학원을 갔고. 그리고 30대를 여는 동시에 엄마가 되었다.
두둥. 인생 2막의 시작.
인생 2막은 그 전까지와는 사뭇 달랐다. 내가 계획하고 목표를 정한다 한들, 거기에 맞춰 아이가 자라주지도 따라주지도 않는 세계였다. 그 세계에서 나는 조금 방황했다. 살림, 육아 근육이 없는지라 매일 휘둘렸고,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차 흐릿해지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다
조금씩
일상의 무용한 순간들을 받아들이게 된 것 같다.
아이가 쌔근쌔근 자는 숨소리. 따뜻한 체온, 아이만의 체취.
가족과 함께 산책하러 나가 느끼는 바람, 물소리.
여름이면 와사삭 베어먹는 수박, 몰캉하고 달콤한 복숭아.
요가를 하며 세포 하나하나 호흡 하나하나에 집중해 비로소 숨 쉬는 나만이 남는 느낌.
초록초록 이파리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며 내 상념을 걸음마다 버리는 걷는 순간.
그리고, 책.
펼칠 때마다 나를 보듬어주고
나를 다른 세계로 이끌어가는 그것.
누군가는 그렇게 말한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렇게 읽고 쓰느냐고.
어쩌면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꾹꾹 눌러가며
눈에 보이는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마음을
일찍이 소진했는지도 모르겠다.
유용함과 무용함을 선 그어놓고
유용함의 편을 드는 시대.
돈이 되는 일,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로 하루를 꽉꽉 채우기에도
시간과 에너지가 부족한 사람들 속에
나 하나 정도는 무용함에 손을 들어주면 안되는걸까.
최근 윤가은 감독의 ‘호호호’라는 에세이를 읽으며,
나만 그런 마음을 가진 건 아니었구나 싶어 새삼 반가웠다.
‘호불호’가 없이 ‘호호호’만 많은 저자의 소소한 호호호들.
어린이, 꽃, 막장드라마, 여름, 문구류, 청소, 별자리, 조카, 걷기 등
이 수많은 좋아하는 마음이
결국 저자를 영화로 이끌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이제 그 마음들을 밀어낼지 말자고.
모든 좋아하는 마음들을 꼭 끌어안고 즐겁고 활기차게 달려나가자고 말을 건넨다.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마음보다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이
우리 삶을 움직인다고 믿는다.
좋아하는 마음들이 모여 해야하는 것들을 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책을 내고 책 이외의 것들에 휘둘렸다.
그리고 다시.
좋아하는 마음으로 나를 채우는 중이다.
그래 그 마음이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