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부엌 창문 너머로는 학교 운동장이 보인다. 처음 이 집에 이사 올 때부터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운동장으로 뛰어노는 모습이 보이겠구나 싶어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애초 기대와는 달리, 학교 운동장은 지난 2년간 텅 비어있는 날이 많았다. 미세먼지가 많아서, 코로나로 인해...
조용한 운동장의 모습이 익숙해져 갈 때쯤, 코로나 상황이 완화되면서 다시 체육 활동, 쉬는 시간, 하교 후에도 운동장 사용이 허용되었고, 아이들이 뛰어나와 왁자지껄한 에너지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정작 내 아이는 정적인 아이라 체육 시간이 아니고서는 운동장에 나와 있을 일이 별로 없지만 말이다. 내 아이가 아니라도 아이들이 저마다 깔깔거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너무 좋아진다. 양떼들이 풀밭을 노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기엔 굉장히 동적인 모습이긴 하다)
엄마가 되고, 아이 둘을 10년을 키우며
내 아이가 아니라도 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어여쁜지를 알게 되었다.
어떤 때는 주관적인 감정이 개입되지 않은 채로 다른 아이를 바라보는 것처럼만 내 아이를 바라봐주면 아이가 더 행복할 수 있겠다 싶을 만큼. 모든 아이들이 각자 귀하고 예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산책을 나온 돌쟁이 아가의 통통한 볼과 다리부터, 하교 하고 와다다 놀이터로 달려와 신나게 뛰어노는 초딩들, 목소리는 걸쭉하고 여드름이 뻑뻑 난 중딩들까지도. 물론 이런 마음으로도 내 아이들과는 지지고 볶는 것이 일상이지만 말이다.
추석을 앞두고, 태풍이 일부 지역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리고, 누군가의 소중한 아이들이 희생을 당했다. 생명에 경중이 있겠냐만은, 특히 엄마가 차 빼는 것을 도와주러 주차장을 함께 갔다 변을 당한 중학생 친구에 대한 기사는 너무나 마음이 아린다. 중학생이면 한창 자기 목소리를 앞세울 나이인데, 새벽에 엄마를 도우러 주차장에 함께 내려갈 정도면 얼마나 곱디고운 아이였을까. 그 아이를 생각하고, 그 어머니를 생각한다. 그리고 갑작스런 휴교, 휴원 결정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서 하늘이 이렇게 맑은 날 휴교를 했냐고 투덜거렸던 내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머무르는 하늘은 맑고 푸르르지만, 누군가의 하늘은 흐리고 먹구름이 가득할 수 있음을 왜 몰랐을까.
그저 존재할 것.
그 대전제가 깨져버린 어머니의 마음 앞에서.
나의 고민은 한낱 깃털에 불과하다.
누군가의 흐린 하늘을 가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나의 하늘도 그렇게 흐릴 수 있음을 아는 사람이 되길 바래본다.
그리고 감히 내가 짐작할수도 없을만큼 생채기 난 가족들의 마음이 다시 아물길 바란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기에. 그들도 다시 맑은 하늘을 마주할 수 있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