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를 쓰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혼자, 끝까지 써내려가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
쓰면서도 이게 맞나? 이렇게 쓰면 뭐가 될까? 라는 의구심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그래서 책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원고를 쓰는구나 싶었다. 나에겐 함께 길을 걸어갈 사람도, 그 길이 맞는지 중간중간 확인해줄 가이드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나를 계속 쓰게 한, 불타오르게 한 불쏘시개 같은 감정들이 있었다.
그 세 가지 감정은, 공허함, 우울감, 그리고 질투 였다.
나는, 공허했다.
매일 힘들다, 힘들다 노래를 부르게 했던 둘째가 드디어 네돌 가까이 되어서야 기관을 제대로 다니기 시작한, 꽃피는 4월이었다. 작년에 초등학교 입학식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첫째도 매일 등교를 하던 때였다. 아침에 잠깐 분주하게 움직이면, 아이들이 하나둘 각자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나를 속박하는 듯했던, 보이지 않는 족쇄라도 채워져있는 듯해서 갑갑했던 육아 세계에서 해방되는 시간이었는데 기쁘지만은 않았다. 육아 독립 만세!! 라도 부르며 놀러다닐수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았다.
큰아이는 2학년이 되자, 혼자 책가방 싸고 준비물 챙기고 숙제를 하며 확연히 달라졌다. 놀이터에서 친구들과도 혼자 30분 정도는 놀 수 있었다. 둘째는 여전히 나의 손이 필요하지만, 유치원의 특성상 3시까지는 그 안에서 안전하게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훌륭하게.
그런데, 이제 난 뭐하지? 아이들은 각자의 세계가 생기는데, 나에게 남은 것은 집콕하며 몸에 붙은 살과 늘어난 주름 밖에 없는 듯했다. 그래서, 쓰기 시작했다. 글 쓴다는 돈도, 다른 도구도 필요 없었으니까. 집에 있는 노트북을 마구 두들기기 시작했다.
두 번째 감정은, 우울감이었다.
이 우울감은, 9년을 차곡차곡 쌓여있던 것이라 순식간에 없어지지 않았다. 나 자신을 내려놓고 아이들만 바라보며 살아온 기간 동안 분명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지만, 자존감은 조금씩 낮아졌다. 20대, 30대에 만들었던 스펙들은 이제 나의 자존감을 유지하는 동아줄 역할만 할 뿐이었다. “나 어디 학교 나온 여자야, 나 어디 다니던 사람이야” 하며 가끔 기죽지 않기 위해 하는 말들 속에서만 살아있는 스펙이었다. 낮아지는 자존감과 높아지는 우울감 속에 그 동아줄조차 끊어질 듯 덜렁덜렁할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책을 펼치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은유 작가님의 “글쓰기의 최전선”에 내 마음을 긁어주는 내용이 있어 발췌해본다.
삶이 굳고 말이 엉킬 때마다 글을 썼다. 막힌 삶을 글로 뚫으려고 애썼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이 견딜만한 고통이 될 때까지 붙들고 늘어지는 일임을. 혼란스러운 현실에 질서를 부여하는 작업이지, 덮어두거나 제거하는 일이 아님을 말이다.(p.9)
뭐라도 있는 양 살지만 삶의 실체는 보잘 것 없고 시시하다. 그것을 인정하고 상세히 쓰다보면 솔직할 수 있다. 상처는 덮어두기가 아니라 드러내기를 통해 회복된다. 시간과 비용을 치르고 정신과 상담을 받는 것을 보아도 그렇다. 아픔을 가져온 삶의 사건을 자기 위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는 말하기의 계기가 필요하다. 글쓰기는 상처를 드러내는 가장 저렴하고 접근하기 좋은 방편이다. 일단 쓸 것.(p.63)
아이들이 크면 자연스럽게 힘들었던 감정이 사라지리라, 육아에서 헤어나면 자연히 밝아지리라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 나의 이 감정들을 한 번쯤 정리하고 싶었다. 어떻게 정리할지 감이 오지 않아 관련 책들을 읽었고 나만의 방식으로 정리한 것이 글이 되었다. 그렇게 글을 쓰면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글을 쓰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어쩌면 나는 나를 위로했던 것 같다.
마지막은 질투심이다.
2년전쯤, 예전 회사 같은 부서 선배 언니가 육아서를 출간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축하를 건넸지만, 마음이 복잡해졌다. 언니는 그 책을 기반으로 활발하게 활동을 했다. 다양한 외부 활동, 그 활동을 수놓는 sns가, 내 마음에 돌을 던졌다. 질투심이었다.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이 내 마음에 다양한 파고를 만들어냈고, 나는 예전의 평화로운 호수로 다시금 돌아가고 싶었다. 나는 그냥 엄마로 사는 것이 좋은데, 물론 힘들지만 이 자리로 만족하는데, 마음이 일렁였다. 나도 언니처럼 책을 내겠노라는 그 질투심을 딛고, 썼다. 언니의 조언들에 힘입어, 그렇게 원고를 썼고 출간을 할 수 있게 된 지금에야, 그 질투심에 고맙고 그것을 알면서도 나에게 조언해준 언니가 고맙다.
’아티스트웨이‘에 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문구가 있어 옮겨본다.
질투는 지도이다. 질투의 지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우리가 어떤 것에 질투를 느끼는지 파헤쳐보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여성 소설가들의 성공은 단 한번도 질투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여성 시나리오 작가들의 성공과 실패에는 병적인 관심을 보이곤 했다. 내가 그들처럼 시나리오를 써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처음으로 시나리오를 쓴 뒤 질투는 한여름에 논이 녹듯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동지애가 차지해버렸다. 그 질투심은 나도 하고 싶지만 행동으로 옮길 용기가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가면이었던 것이다.
질투란 그런 것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것이라는 두려움.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두려워서 시도하지 못하는 것을 다른 사람이 버젓이 했을 때 느끼는 좌절감이다. 질투심의 뿌리는 편협한 감정이다. 질투는 풍성함과 다양함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질투는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자리밖에 없다고 말한다. 단 한사람의 시인, 단 한사람의 화가... 당신이 무엇이 되기를 꿈꾸든 그 일에는 단 한사람만을 위한 자리밖에 없다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행동하는 순간, 비로소 거기에는 단 한 자리가 아닌 모두를 위한 자리가 있음을 알게 된다. (p.219)
내가 출간 소식을 알리자, 나에게 원고를 쓰고 있다고 알려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들에게 무언가 도움을 주기엔 내가 너무 미약하다. 하지만, 나도 썼으니 당신도 쓸 수 있다고. 그냥 집안일 하고 아이 키우는 나같은 사람도 썼으니 당신은 당연히 더 잘 쓸수 있다고. 내가 옮긴 질투심이 누군가에게 불쏘시개가 될 수 있다면 나에겐 영광이다. 내가 지핀 불쏘시개가 여기저기 다른 곳에 붙어 더 큰 불덩이가 되길 바란다. 그 불덩이가 다시 나에게 들러붙어 내가 나아갈 수 있게 하는 불쏘시개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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