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7년 서른넷 어느 여름에 작성한 것입니다.
누구보다 ‘나답게’를 실천하며 살아왔다고 자부하는 내가
아이러니하게도 나답게를 실현하면 실현할수록 나를 잘 모르게 되는 모순에 빠져버렸다.
왜냐하면 이 모든 전제에는 나는 ‘변덕쟁이’이며
‘변화하는 존재’라는 게 깔려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무 살에 결심했던 일을 서른네 살에 저질러버렸다.
책에서 그렇게 말하는,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사람의 전형적인 상이다.
그런데 막상 맘에 쏙 들었단 이유로 덜컥 영등포구청역 근처 어떤 공간을 계약해놓고는
그다음에 그 공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를 고민했다.
그 과정에서 그 공간을 수없이 부수고 다시 세우고 부수고 다시 세우고를 반복했다.
다 내가 변덕쟁이라 그렇다.
나의 변하지 않는 본질은 끝없이 변한다는 것이다.
나는 변화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변화를 사랑하는 사람의 ‘나답게’는 어떻게 생겨먹은 걸까?
계속해서 변화해야만 변하지 않는 본질에 다가가는 건가.
그래서 변화가 잦은 일을 했지만,
어떤 일이든 어느 수준에 이르려면 변화보다는 반복에 힘을 쏟아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내 안에 장미의 씨가 있다고 믿고 수없이 장미다움을 실현하려 노력했는데,
알고 보면 장미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의 당혹스러움을 이해할 것이다.
심지어 장미라고 해도 복잡해진다. 그 장미에도 수많은 종이 있고, 심지어 어떤 건 우리가 아는 장미처럼 생기지도 않았다. 장미 축제에 가보니, ‘장미 축제’라는 이름이 없었다면 절대 장미라고 생각도 못할 수많은 이름 모를 꽃들 천지였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무슨 종인가.
그럼에도, 내가 혹시나 사막에서 드물게 피어나는 요상한 식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그런데 내가 있는 곳은 사막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 걸 제쳐두고 사막으로 가는 게 나답게 사는 걸까?
아니면 사막에서 사는 식물도 과학의 힘을 빌리면 다른 곳에서 살아갈 수 있듯
나도 인위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하는 걸까?
사실 이 모든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나는 ‘정말 사막에서 자라는 요상한 식물이냐’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하지 못하게 되면
열심히 쌓아놓은 고민의 성은 와르르 무너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답게 살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하는데,
사실상 나다움을 찾기 시작하면,
‘나다움을 찾아 헤매는 나’만이 남는다.
+ 2020.12.10에 남기는 덧붙임.
영등포구청에 만들었던 '퍼플스테이지'라는 공간은
준비 안 된 주인을 만나 결국 1년 4개월 만에 닫아야 했고,
몇 년 동안 나는 완전한 재택 프리랜서로 일을 했으며,
올해 9월 김포 풍무동에 사무실을 구해서 그곳에서
열심히 사업을 준비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