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의 몸에서 색이 없어지는 것을 지켜본다

by 변민아

*이 글은 2017년 서른넷 어느 여름에 작성한 것입니다.






한 달 전만 해도 할머니와 어딘가에 놀러 가고 싶다고 말했는데,

그 사이에 할머니는 허리를 다치셨고, 그 뒤로 줄곧 누워계시는 시간이 늘었다.

인간은 누워 있을 때보다 서 있을 때, 움직일 때, 그리고 앉아 있는 상태가

더 생기 있고 ‘삶’에 가까운 자세라는 것을 배우게 해주신다.


아기는 누워 있음으로 해서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선사하여,

그보다 오래 산 어른들을 찬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노인은,

그것도 생기를 다 잃어버리고 고통과 싸우는 것만이 남아 있는 듯한 노인이 누워 있는 모습은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장기간 누워 있을 상황을 대비하는 것처럼 보여

애처롭고 눈물을 자아낸다.


분명, 한 달 전만 해도 할머니의 얼굴은 달랐다.

아니, 내가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시간에는 경계가 없음에도 이상하게 해가 바뀔수록 할머니의 나이는 점점 더 명확해진다.

한 살 한 살의 경계는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더 명료해지고,

인간의 운명과 인생의 덧없음을 조롱이라도 하는 듯,

하루하루의 경계도 점차 날카로워진다.


2019년 1월 14일.

여느 때와 같이 도서관에 갔다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방문 틈 사이로 할머니가 깨어 있음을

– 이제 그 빛이 ‘깨어 있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도 대비해야 하지만 –

알리는 신호를 보고,

방문을 살짝 열어 할머니에게 나의 귀가를 알린다.


밤은 생명을 창조하기도 하지만, 냉기로 그것을 앗아가기도 한다.

할머니의 방은 종교적이고 신성한 상징물로 가득하지만,

할머니 한 사람이 내비치는 건조함과 회색빛의 피부는

‘종말’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화장실에 들어간다.

그때도 알고 있었는데, 후회할 걸 뻔히 알면서도

할머니와 놀러 가고, 할머니와 성당에 가는 것이 언제가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무지함으로

미뤘던 나 자신을 탓한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으랴. 또 돌아간다 한들, 그것을 행했다 한들,

할머니의 지금 같은 모습은 변함없이 나에게 후회를 안길 것이다.


얼마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

미리 심리적 방어막을 쳐놓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일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 정도의 후회감을 낳는 할머니라면,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은 살았던 어른이란 뜻인가.

누군가에게 ‘더 잘할걸’,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직도 너무나 많은데’라고

생각하게 하는 존재의 삶은 덧없지 않다.

그를 이어 살아가는 현존재가

그의 자손이 그리움과 후회와 원망인지 사랑인지 모를 감정으로 뒤범벅되어 산다면,

그 존재는 제대로 된 관계망 속에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할머니를 위해서 – 나를 위해서 –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근래 할머니를 바라보여 알아차린 것들.


할머니의 몸에서 수분이 없어지는 게 느껴진다.
할머니의 몸에서 색이 없어지는 게 느껴진다.
할머니의 몸에서 힘이 없어지는 게 없어진다.


할머니의 숨소리도 가늘어진다. 코고는 소리도 장애물에 막혀 이상한 멜로디를 만들어낸다.

다만, 맥박 소리와 그럼에도 살겠다는 마지막 의지가 교묘하게 순환하고 있는 듯하다.



인간은 컬러를 꿈꾸지만,
결국엔 흑백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마지막은 그 흑백마저도 소멸해버린다.

그럼에도 그 할머니로부터 새로움을 발견한다.

그것은 미래의 나일 수도 있고,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학습하는 것일 수도 있다.

가는 데 순서 없다는데 건방지게 할머니의 소멸을 미리 준비한다.


한 사람의 생애를 지켜본다는 건 생각보다 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내가 직면하고 싶지 않았던 것들과 조우해야 하고,

그것은 아주 감각적으로, 그리고 그 변화를 체감할 수 있을 정도로

운명이라는 커튼이 한순간에 창문과 빛을 차단해버리듯이,

단 한순간에 생명이 사라질 수 있다는 고문에 시달려야 한다.


예전에는 할머니를 지켜볼 수 없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노인이었다.
‘할머니’라는 이름의 숙명이다.


하지만 그 노인은 나의 생애주기에 따라 너무나 다채로운 변화를 보여준다.

아이가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어가는 것보다 더 으스러지는 변화다.


할머니는 늘 나에게 가을이었던 것이다.


나는 기껏해야 할머니의 풍년을 볼 수 있었던 것이며, 봄을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나보다 어린 사람, 그 모두의 숙명이기도 하다.

할머니의 가을에는 지켜볼 줄 몰랐다.

풍년이란 것이 주는 환상이다.

할머니의 겨울에는 추위를 직감했다.

곧 씨앗을 잉태하기 위한 잠이 시작될 거라는 경종을 울리기까지는,

그마저도 시간이 걸렸다.


오늘 방문을 연 나는,

누워 있는 할머니를 보며 나를 연습하기 위한 할머니의 지혜라고 달랬다.

그 달램은 아직 눈물을 쏟을 때는 아니라고, 애써 눈물샘을 막아주었다.

그래도 그 하루하루를 지켜봐주는 한 사람이 있는 할머니의 삶은

가치 있고 고귀하다고, 감히 나 자신을 위안한다.

한 사람의 삶은 그렇게 조용히 평가되는 것이다.

나를 조용히 지켜보는 한 사람에 의해서, 그 삶이 영생하는 것이다.


떠나는 사람은 물을 다 쏟아놓고 가지만,

그 메마름을 산 자의 눈물로 채운다.

그래서 죽음에는 눈물이 필요한 것이다.

노인은 젊은 사람에게 그 존재만으로도 가르쳐주는 게 많다.

따라서 오래 산 나무는 그 존재만으로도 스승이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예언을,

평온함을 위한 내 마지막 무기라고 여겨야 한다.

뜬눈으로 늘 새벽을 보내는 야행성 인간인 나는,

내가 활동하는 시간에 한 생명이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잊고 싶지 않다.

할머니의 모습은 지금 삶에 대해서 함부로 논하지 말고,

‘살기 싫다’는 말도 함부로 뱉지 말아야 한다는 경건함을 준다.

그래서 글을 써서 할머니의 존재를 이어가고 싶다.

할머니가 죽음으로 가는 그 과정은 나에게 삶의 중앙으로 가게 하는 힘이다.


할머니는 이제 ‘누워 있어야만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의사의 명으로 할머니는 더 이상 자기의지를 상실해버렸다.

설거지, 청소, 정리, 끝없는 할머니의 집안일이 ‘생의 단서’라고,

언젠가 저렇게 할 수가 없는 그날이야말로 정말 할머니가 늙으셨다는 증거라고

떠들었던 엄마와 나의 예언이 현실이 되어버렸다.

나는 외면하지 않겠다. 할머니가 그런 단계에 접어들었음을,

슬픔과 아픔, 고통에 직면할 것에 대해서 적어도 눈을 돌리지 않겠다.


그래서 나는 할머니를 보아야겠다.

할머니가 오후 4시에 혼자 커피를 드시는 게 싫어서

아무 이유 없이 같이 앉아 있었던 몇 주 전의 나.

그것이 낭비라고 생각되는 건 수치스럽다.


삶의 기준이 무너진다. 생산성이라는 것,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은

내 삶의 한 부분이긴 하지만 그만큼 효용성이 없어 보이는 수많은 행동들도

할머니와의 관계로 만들어진 삶에서는 의미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후회가 절감되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부터 후회하고 있으니까.

이럴 줄 알았는데, 왜 그랬을까, 하는 아주 우둔한 자의 후회.

그만큼 젊음은 이기적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


할머니를 본다.

할머니를 담는다.


내일 나는 앉아 있는 할머니를 볼 수 있길,

내가 할 수 있는 기도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이

오히려 날 무력하게 하지만 그래도 기도하겠다.

서서히 이별을 준비하게 하는 할머니의 지혜로움에 감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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