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미 Aug 17. 2023

성장했다는 착각, 우물 안 개구리


열흘을 넘게 이력서의 경력 사항을 썼다 지웠다 수차례 반복했지만 여전히 쓸게 없었다. 오래된 작업 폴더를 뒤지며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어 포트폴리오를 만들어보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전문대 졸업, 두 아이의 엄마, 12년 차 물경력, 팀으로 일해 본 경험 없음, 프로젝트 리딩 경험 없음' 이게 나의 현실이었다. 나는 왜 이렇게 된 걸까?


1년 정도의 웹에이전시 경험을 바탕으로, 사수도 없고 디자인 회사도 아닌 곳에서 10년 가까이 일을 했다. 웹디자이너로 시작한 나의 역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UI디자이너가 되고, UX도 고민해야 했다. 그 사이에 육아휴직으로 인해 일시적 경력 단절도 겪었다. 단절의 시간을 만회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다. 작은 회사에 디자이너가 한 명이다 보니 인쇄물이나 로고를 만드는 등 개발과 운영 외의 업무는 모두 디자이너의 몫으로 할당되어 힘든 상황도 많았지만, 주어진 일을 충실히 해내고 부족한 것은 공부로 메우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현실은 무엇하나 제대로 내세울 것이 없는 잡부나 다름없는 존재일 뿐이었다. 이 회사 한정의 맞춤형 인재로 성장한 것, 이게 내가 이력서를 제대로 쓸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나를 다독이면서도 어째서 이렇게까지 방치를 했느냐는 원망이 동시에 들었다. 회사를 탓하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다. 회사는 나를 고용한 대가를 꼬박꼬박 지불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결과는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책임은 나에게 있다.


회사에서 정치질을 하는 것이 극도로 싫었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누가 얼마를 받고 나보다 얼마를 더 버는지에 대한 관심도 없었다. 관심 둬봤자 나만 힘들어지니까 생각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팀으로 일을 한 적이 없으니 팀장을 해보기는 커녕 팀원으로 일을 한 적이 전무하다. 거의 모든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인원이었지만 팀이라는 소속감은 없었다. 스스로를 깍두기라 생각했다. 개발팀과 운영팀은 협업툴로 업무 지시를 주고받는데 내게 떨어지는 업무 지시는 늘 사내 메신저나 상사의 입을 통해서였다. 기획서 한 장 없이 '일단 만들어봐'라는 말로 시작되는 일이 대부분이라 자료를 정리하고 요구사항을 정리하는 건 언제나 내 몫이었다. 업무 지시 양식을 주고 맞춰 달라고 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혼자서 다수를 상대하기에 벅찼던 나는 내가 그들에게 맞추는 방식으로 일을 해왔던 것이다. 게다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을 한다거나 나의 어려움을 이해받기 위해 노력한 적도 없었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으니 나머지가 잘 꿰어질 리가 만무하다. 그렇다고 옷을 다 뜯어버리면 그건 퇴사를 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는 것이고, 일일이 다 풀어서 다시 꿰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래도 여전히 이 회사는 두 번의 육아휴직을 다녀올 동안 기다려 준 고마운 곳이다. 승진이나 성과급을 받는 기쁨은 없어도 매월 고정적으로 들어오는 수입을 통해 정신적으로 여유로울 수 있었고, 개발부서나 운영부서에 비해 시간적 여유가 있었기에 아이들과의 관계에 소홀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과거의 나의 선택으로 얻은 유익함이다. 얻은 것이 있다면 잃는 것도 반드시 있기 마련이다. 그게 세상의 이치니까. 단지 회사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라 생각하던 내가 회사의 성장은 나의 성장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던 거다.


지나온 과거는 어쩔 수 없으니 앞으로가 중요한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전히 막막하기만 했다. 막막함과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디자이너들의 성공담이나 이직준비 관련 글을 읽으며 따라 하다가 잘 안돼서 때려치우길 반복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이직을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이런 제목의 게시글을 보게 된다.


2020년 7월 12일, 페이스북에서 본 게시글
연봉에 대한 관심도
이직에 대한 관심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보내온 시간이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그러다 문득, 내게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과 지금이라도 남겨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글은 어떻게 커리어가 되는 걸까?
어떻게 하면 '나'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내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커리어가 되는 글쓰기> 라이브 톡을 기대하며 적은 글


커리어가 되는 글쓰기라, 정말 솔깃하지 않은가? 이 라이브 톡을 계기로 나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것들을 경험하게 된다.



사진: UnsplashValentin Lacoste




매거진의 이전글 13년 묵은 이력서를 꺼내보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