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잘 써서 부러운 시인
[한겨레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내가 등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황인찬이 등단했다. 주목을 받았다. 나도 주목받았지만 비교가 안 됐다.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누구와도 비교가 안 됐다. 그해 한 출판사 연말 모임에서 선배 시인 두 명이 황인찬에게 시집 출간을 제안했다. 그 선배들은 문학잡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고, 소속된 출판사가 달랐다. 황인찬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옆에 나도 앉아 있었다. 같은 해 등단한 시인들 몇이 함께 앉아 있었다. 우리도 난감했다. 꿔다 논 보릿자루 같았다. 난 그 두 선배가 미웠다. 내 앞에서 무슨 짓이지!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황인찬이다. 그리고 저 두 선배의 시를 나는 정말 좋아한다. 그러니까 그 모든 상황을 그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에유우.” 인찬이는 늘 이렇게 대답한다. 그의 언어 어디에도 모난 구석이 없다. 그가 된발음을 하는 것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언어는 성정에서 온다. 인찬이는 둥글둥글 유연하다. 나는 그것이 시와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올여름에 나온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가 그렇다.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가 ‘간결한 감각의 언어’로 흰 여백을 만들어냈다면, 두 번째 시집은 그냥, 시를 넘어, 시를 만들어냈다. 자유로워졌다. 그게 너무 부럽다. 시를 이렇게 써도 되는구나, 나는 몰랐다. 인찬이도 몰랐겠지, 모르는 걸 묵묵히 했겠지.
“첫 번째 시집을 내고 고민이 정말 많았거든요. 시를 쓸수록 시가 답답하다는 생각이 자꾸 늘어났어요. 저 자신의 시에 대해서도 그렇고, 시라고 하는 양식 자체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두 번째 시집을 묶으면서, 그러니까 첫 번째 시집을 낸 직후부터는 딱 한 가지 생각만 했어요. ‘첫 번째 시집과는 다른 걸 해야겠다’는 생각이요. 더 멀리, 더 가볍게 날아가고 싶었던 것 같아요.”
가을에 나는 몇 번인가 시를 쓰다가 지웠다. 황인찬의 시를 흉내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더 멀리, 더 가볍게’ 날아서 간 세계에 무엇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가 여기를 두고 정말 날았으며, 어딘가에 닿았다는 것이다. 모든 시인들이 그렇게 날아갈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주저앉는다. 사실이다.
“첫 번째 시집을 내면서 맞닥뜨린 시에 대한 여러 고민들이 몇 년 동안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두 번째 시집은 그 고민들과 계속 이리저리 부딪히며 나온 좌충우돌 얼렁뚱땅의 결과물이라고 생각해요. 두 번째 시집이 첫 번째 시집보다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편차가 심하고, 못 쓴 시도 오히려 많고. 그래도 저는 두 번째 시집이 더 좋아요. 솔직한 것 같아서.” 나는 그의 자부심을 사랑한다. 하지만 열등감을 감출 수는 없다. <희지의 세계>가 출간된 후 많은 사람들이 인찬이를 인터뷰했다. 읽지 않았다. 그는 모차르트일 수 있지만 나는 살리에르조차 될 수 없어서.
첫 번째 시집에서도 그랬지만 두 번째 시집에서도 인찬이는 수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물에 젖은 몸을 말리며/ 우리는 웃었다’ 이렇게 쓴다. 그리고 어딘가에 이런 문장을 배치한다. ‘밖에서는 자꾸 비가 내린다’.
문장들 사이의 간극을 헤아리는 게 인찬이의 시를 읽는 일이다. 인찬이는 이 과정에서 시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저는 시가 어려워서 못 읽겠다는 말이 정말 듣기 싫었어요.” 그렇지. 이 말은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시인들이 늘 듣는 말이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해하지 말고 느끼세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속으로는 생각했다. 쉽게 이해되면 그게 시야?
인찬이는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시를 쓰고 있으면 쉽게 들키고 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조금 다른 얘기지만, 시가 암호처럼 보이면, 암호를 풀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 시는 더 이상 읽히지 않게 될 거 같아요. 사실은 아무것도 완전히 해결된 게 없는데도, 암호가 풀려버린 기분이 들면 사고가 거기서 멈춰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쉽게 읽히고, 쉽게 들키지 않는 시를 쓰고 싶어요.”
그게 내가 쓰고 싶은 시다. 내 언어로도 할 수 있을까? 번번이 포기했어, 나는, 인찬아. “저는 저 자신 그리고 저 자신의 시에는 관심이 없어요. 시라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을 열심히 하면 저 자신의 시를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나는 나를 생각한다. 그래서 시집 제목에도 ‘나는’이 들어간다. 많은 시인들이 ‘나’를 생각한다. 자신만의 언어와 맥락을 갖는 게 시인의 꿈이니까. 그런데 인찬이는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역설을 어쩌면 좋나. 인찬이는 인찬이의 시를 갖게 된 것 같은데.
인찬이의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는 9000부가 팔렸다. 두 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는 벌써 7500부가 팔렸다. 1만권도 팔릴 기세다. 시집이…. 오래전 선배 시인들은 시집이 많이 팔리는 건 창피한 일이라고 했다던데. 아, 인찬이 창피하겠네. 시집을 그렇게 많이 팔면 진정한 시인이 아니지. 그런데 나는 왜 인찬이 시가 좋지? (특히 ‘건축’이라는 시!)
황인찬은 독자에게는 축복일지 모르나, 시인에게는 물음표다. 고민하게 만든다. 아, 내가 이렇게 쓰는 게 옳은가, 라고. 하하. 웃음이 나온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나는 시인이 아니라 그저 독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여우 같은 곰을 봤나.
“간혹 낭독회 같은 데서 독자들을 만나는 경우가 있어요. 책을 들고 와주시는 분들을 보면 부끄럽고 감사한 마음이 들어요. 대체 이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이 책을 사는 거지? 놀랍기도 하고.”
“네 시집이 그 사람들을 부른 거야. 시집이 사람을 불렀다고. 굉장하지?”
인찬이와 나는 바람 부는 겨울 거리를 걸었다. 인터뷰는 끝났고, 나는 쓸쓸해서 밤이 미웠다. 하지만 낮이었다면 얼굴을 숨길 곳이 없어서 괴로웠을 거다. “아직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디로든 계속 가고 싶어요. 지쳐서 못 해먹겠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는요.” 인찬이가 시의 길 위를 걸어가며 말했다. 너도 나랑 같구나, 온 세상이 까맣구나, 생각하는데, 인찬이의 긴 겨울 코트 속에서 한겨울의 바람이 순식간에 쏟아졌다. 인찬이가 날아갔다. 정말 그랬다.
이우성 시인
:
- 부럽다.
- 내 시의 가치를 믿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도 별로 없고, 다 어렵다고만 하고, 해서, 슬프니까, 부럽다.
- 그리고 인찬이는... 나보다 친철하고 나보다 덜 모나고 나보다 얼굴은 별로지만... 부럽다.
- 오늘의 결론! 2016년엔 시를 열심히 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