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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Dec 25. 2015

디자이너 헨릭 빕스코브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양말 한 켤레


그냥 창의적인 사람 / 뽀빠이와 러시안 보이


나는 시를 쓴다. 예술을 한다면 하는 거 같은데, 정말 내가 예술을 하고 있나? 그저 한 편 한 편 써나 가고 있을 뿐인데. 삶은 아프고, 혼자 버티기엔 외롭고, 단번에 뛰어넘기엔 너무 높으니까, 쓰는 거다. 1그램이라도 힘이 될까 하고. 사람들에게.


헨릭 빕스코브는 옷을 만든다. 덴마크 출신인데 시즌마다 파리 컬렉션에 참여한다. 북유럽 출신의 패션 디자이너가 파리에서 패션쇼를 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다.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옷을 보면, 옷이 그저 스타일의 도구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은유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거창하게 말하면 작품처럼. 그러나 거창하게 말하지 않아도 그는 옷을 상상의 옷걸이에 건다고 적는 게 과장이 아니다.


헨릭 빕스코브의 전시가 대림미술관에서 열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대략 이런 그림이 그려졌다. 패션 디자이너인데 작업을 확장해서 파인 아트 작품을 만들고, 음악은 원래 좋아했을 거고, 좋아하니까 만들어 본 적도 있을 거고, 요즘은 패션 디자이너들이 영상 작업도 하니까 영화도 찍어봤을 거고… 그러니까 패션을 기반으로 한 복합적인 전시를 하겠구나.


그리고 정말 그러한 것 같다. 쓸 데 없이 한 가지 걱정이 들었다. ‘사람들이 헨릭을 예가로 보면 어떡하지?’ 내가 헨릭이라면 스스로를 아티스트로 불리는 게 싫을 것 같다. ‘장르를  넘나드는’과 같은 설명이 따라붙는다면 전시된 작품들을 챙겨서 덴마크로 돌아가 버릴 것 같다. 헨릭은 그냥 자신의 삶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다. 헨릭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대림미술관에서 인터뷰를 제안했다.


“저는 영어 못하는데요. 요즘  과외받고 있어요.”

“영어는 통역이 하면 되죠.”


며칠 뒤 헨릭 빕스코브가 스카이프 회선을 타고 대림미술관 한남동 사무실 회의실 벽걸이 TV에 나타났다. 와, 와, 잘 생겼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그런데 정말 잘 생겼다. 삼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멋지게 나이 들고 있는 형 같았다. 방금 일어났는지, 모자를 썼고, 눈은 약간 부었다. 세수는 안 한 것 같았다. 하지만 덴마크의 해가 그가 앉아 있는 등 뒤의 창을 통해 보였다. 눈부셨다.


내가 묻고 싶은 건, 나랑 똑같은 한 명일 뿐인 당신이 옷도 만들고 순수예술 작품도 만 음악도 하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와,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 중 ‘Popeye-Death By Penises, 2014’가 있던데 거대한 뽀빠이가 왜 누워 있지 않고 서 있는지, ‘Russian Boys, 2013’라는 작품이 왜 굳이 ‘러시안’인지, 그리고 몸을 해체하고 재조합하는 작품이 많던데 너에게 이란 떤 매체인지 등에 관한 것이었다. 헨릭은 핀란드와 독일에서 전시를 한 적이 있다. 자료를 찾아보면 ‘패션 디자이너’라는 틀에 가둬두기에는 꽤 광범위한 작업을 한다. 그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보이거나 느껴지는 것은 ‘몸’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옷이라는 건 몸의 크기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크게 만들려고 해도 사람의 키를 넘는 옷을 만들 순 없다. 그리고 사람의 팔과 다리는 분리되지도 않고, 팔이 다리의 위치에 있지도 않으니까. 뭐랄까, 옷을 만들다 보면 초현실적인 무엇인가를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지 않을까? 그래서 ‘Popeye-Death By Penises, 2014’나 ‘Russian Boys, 2013’ 같은 작품이 탄생한 거 아닐까? ‘뽀빠이’는 몸 여기저기에서 마구 솟아난 ‘페니스’ 때문에 죽고, ‘러시아 소년’은 살아있지만 그저 쓸쓸해 보인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고 팔과 다리와 머리와 몸통이 있지만 인간의 그것은 아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거대한 끈으로 당기지 않으면 뽀빠이처럼 주저앉아 죽을 것 같다. 이미 죽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저는 몸이 건축물 또는 구조물이라고 생각해요.” 헨릭이 말했다. “거대한 물체를 만드는 일부인 거죠. 그리고 유머가 중요해요. 뽀빠이는 페니스에 의해 죽어요. 뽀빠이는 더 강한 신체를 갖고 싶어 했을 수도 있어요. 그것이 그를 지켜주거나, 더 큰 쾌락을 느끼게 해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면서 보디빌더를 예로 들었다. “보디빌더들이 큰 근육을 꿈꾸는 건 더 강해지기 위한 거잖아요. 원하고 노력해서 근육을 갖게 된 거죠. 하지만 우리가 더 완벽한 삶을 살기 위해 원하는 일이 우리를 죽일 수도 있어요.”


솔직하게 적으면 내가 너무 안 똑똑해 보이겠지만, 인터뷰 도중엔 이 말을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난 영어를 거의 못하고, 이해력도 좋지 않다. 차분히 생각해보니 그가 패션 디자이너로서 자신의 사고를 확장하는 의미만으로 패션 이외의 작품을 만드는 것 같지는 않다. 소위 ‘베이스’에 대해 말하자면 헨릭의 경우 ‘패션’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내가 보기엔 그의 태도, 인식과 사상이 ‘베이스’가 될 것 같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제가 어렸을 때 엄마와 아빠는 병원 요양 시설에서 일했어요. 그래서 저는 어릴 때부터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배웠어요.” 헨릭이 말했다. 그가 과거에 매체와 인터뷰한걸 봤는데, 패션 디자이너가 되기로 마음먹었을 때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과연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일까,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헨릭은 충분히 좋은 일을 하고 있다. 그가 만든 의상과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돌아볼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무엇인가 느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작품엔 이야기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Russian Boys, 2013’ 같은 경우는 그 인형 작품을 만들 때 러시아어를 하는 라트비아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저를 도와주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인형이랑 생긴 게 닮았더라고요. 그래서 러시안 보이,라고 이름 지었어요.” 웃으며 되물었다. “작품 제목을 그렇게 즉흥적으로 지어도 되는 거예요?” “제목에 이야기가 담기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작업을 해나가는 과정이, 그러한 일련의 과정 자체가 작품에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그의 말을 노트에 옮겨 적었다. 시 쓸 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어떤 사람은 그냥 드로잉을 하나 그려 놓고 작품을 끝낼 수도 있을 거예요. 저는 그런 편은 아니에요. 이렇게도 만들어볼까, 한 번 보고, 다시 또 보고, 또 다르게 만들어보고, 자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고, 그러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보기도 하고. 더 지적인 발상을 해보는 거죠. 이런 과정이 중요해요. ‘Russian Boys, 2013’도 그런 과정을 담아보려고 한 제목이죠.”


그러니까 그냥 지나치지 말자. 뽀빠이 몸에 돋아난 수백 개의 살들이 페니스라는 걸 알고 그저 웃으며 서 있지만 말고, 나무 인형들이 쓸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고 고개 끄덕이며 다른 작품이 있는 곳으로 쓱 가버리지도 말자. 헨릭의 사고가 어떻게 발전하고 또는 실패해나갔는지 상상해보자. 하지만 이런 강요는 안 좋은 거겠지? “사람들이 모든 걸 다 알아야 하는 건 아닐 거예요. 무엇이라도 기억해준다면 좋겠어요. 가장 중요한 건 제가 그들에게 보통 때는 할 수 없었던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거예요. 옷이나 물건은 스토어에서 팔면 그만이에요. 제 뇌가 활동하고 있는 게 더 중요해요. 양말 한 켤레가 그냥 양말 한 켤레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상상력을 일으킬 수 있도록 다차원적이어야 해요.” 그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라고 묻고 싶었다. 너무 편하고 쉽고 무책임한 질문이어서 나는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돌려 밖을 바라보았다. 등 뒤의 창 밖으로 오후의 빛이 난리였다. 헨릭의 등 뒤에 있는 태양과 같은 태양이 떠 있겠지.


헨릭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나는 영어 과외 선생님을 만나서 말했다. “선생님, 한 달 안에 영어를 마스터하게 해주세요.” 그러자 선생님이 되물었다. “왜요?” 내가 대답했다. “곧 헨릭이 와요. 걔랑 얘기를 더 해야 해요.” “헨릭이 누군데요?” “음, 헨릭은, 아, 얘를 뭐라고 말해줘야 할지, 얘는 패션 디자이너인데 그림도 그리고, 설치 미술 작품도 만들고, 노래도 만들어요. 그런데 멀티 아티스트같이 못생긴 말로 불리는 게 얼마나 촌스러운지도 아는 애예요. 걔는 그냥 창의적인 사람이 되고 싶대요.”


옷을 사야겠다. 한국에서도 판다던데. 멋지게 보이려고 옷을 입는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내가 무엇인가 상상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번 전시는 덴마크에서 재미있는 작품을 들고 온 친구의 삶을 보는 기회가 될 것 같다. 친구야, 너는 이 삶을 어떻게 견디고 있니? 어떤 세상에서 살고 싶니,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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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전시가 끝나간다.

가을이었나 여름이었나, 대림미술관에서 요청해서, 핸릭과 인터뷰했다.  화상으로. 한 시간 동안.

그는 잘 생겼다. 그리고 무척 신기해 보였다. 늘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람처럼 느껴졌거든.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것이 옳은 일인지를 판단한다, 그러면 창의적일 수 있다고 그때 배웠다.

그리고 나는 대림미술관 큐레이터들이 좋다. 엄청.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나로선 그게 참...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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