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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Apr 04. 2016

시인 오은

마지막 인터뷰

이충걸, 김지수, 김경의 인터뷰를 좋아했다.

강지영의 인터뷰도 좋아했고, 조경아도 좋아했다.

가까이 혹은 멀리서 그들과 일했다. 행복하다.


나는 그들을 흉내냈다.

자부심을 느낀다.


한겨레esc에 2년 동안 인터뷰를 연재했다.

존경하는 선배들이 언어로 이룬 것들을 잇고 싶었다.

미련도 아쉬움도 없다.


오은 시인 인터뷰로 이 연재가 끝났다.

이제 한동안 어떤 지면에도 인터뷰는 안할 거다.

사람에 대해 말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다시 하나하나 사람을 더 이해하고 배우고 싶어서...


그래서 그동안 모두에게...  죄송합니다.

내가 약해서, 여기 이렇게 적는다. 힘들었다고...








[한겨레][매거진 esc] 이우성의 좋아서 하는 인터뷰


“나, 오은이야.” 처음 봤을 때 은이는 말했다. 뭐 이딴 새끼가 다 있어, 나이도 어린 게, 라고 생각하며 “나, 이우성이야”라고 맞받아쳤다. 나도 만만한 남자는 아니니까. 하지만 졌다. 나는 이미 당황했다. 하지만 곧 은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마음을 다 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게 있다. 마음을 활짝 열고, 내가 당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거. 나는 그 말을 들었다.


그런데 원래… 은이를 싫어했다. 시인으로 등단하기 전에, 그러니까 소위 ‘문청’(문학청년의 줄임말. 등단 준비중인 사람을 지칭함)이라고 부르던 시절에 한 시인 선배가 나에게 말했다. “아, 시 쓰는 오은이라고 들어봤지? 아주 건방진 놈이야. 어른들한테 반말을 하질 않나. 첨 보는 사람한테 시답잖은 농담을 하지 않나.” 나는 선배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제가 등단하면 싸다구를 한 대 날려버릴게요.” 하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당연히, 은이를 때린 적이 없다. 은이에게 화를 낸 적도 없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은이를 좋아한다는 걸.


은이는 이런 사람이다. 4년쯤 전에 은이가 교통사고를 당해 큰 수술을 받았다. 나는 서효인 시인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은이는 이미 병원을 장악하고 있었다. 음… 병원에서 대장이 된 것이다. 은이가 말만 하면 병원에 있는 환자들, 간호사들이 웃었다. 은이는 격이 없었다. 은이가 말을 쉽게 ‘놓는’ 건… 사실인데, 별로 그걸 기분 나빠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기 먹으러 가자. 고기 사줄게.” 나와 서효인 시인을 보고 은이가 말했다. 은이는 환자복을 입고 앞장섰다. 거리로 나갔다. 병원 근처 상점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인사를 주고받았다. 은이는 마치 그 동네 사람 같았다. 우리는 돼지갈비를 먹었다. 은이가 계산했다. “지갑 넣어. 나, 오은이야.” 은이가 말했다. “나는 이우성이야”라고 말을 못했다.


은이는 빨리 친해지고 싶은 거다. 빨리 잘해주고 싶은 거다. 그리고 지금 잘하고 있다고 빨리 말해주고 싶은 거다. 은이는 항상 먼저 다가와서 인사하고 가끔씩 별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한다. 내 첫 시집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가 출간됐을 때, 술자리에서 은이를 만났다. 은이가 말했다. “시 좋더라. 근데 형 외모로 미남의 나라를 들먹이면 안 되지. 못생겨서 쫓겨났나?” 기분 나쁘지 않았다. 내 시집을 읽었구나, 라고 생각했다. 관심을 가져줘서 고마웠다.


황현산, 김정환, 김사인 선생님은 문단의 어른이다. ‘나이’가 많아서 어른이 아니라… 어른으로 모시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어른이다. 잠깐 딴 얘긴데 그런 분들이 몇 분 더 계시다. 반면 나이만 어른인 분도 있다. 안타깝게도. 다시 은이 얘기로 돌아오자면 은이는, 황현산, 김정환, 김사인 선생님께 반말과 존댓말을 섞어 쓰는 유일한 시인이다.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은이만 한다. 하지만 그분들이 은이에게 버릇없다느니, 건방지다느니, 말씀하시지 않는다. 그분들은 은이를 좋아한다. 은이의 ‘반말’은 그가 진정한 어른에게 존중의 마음을 표하는 방식이다. 젊은 작가들은 선생님들 옆에 앉아서 같이 술 마시고 이야기 나누는 걸 어렵고 불편해한다. 그래서 어른들은 약간 소외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는데, 은이는 그분들 옆에 가서 같이 술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눈다. 은이는 그분들을 정말 좋아한다. 그게 느껴진다. 선생님들도 당연히 그걸 아신다. 그러니까 손자뻘 되는 은이가 농담도 하고, 존댓말 썼다 반말도 썼다 해도 귀여워하시는 거다. 은이는 그분들을 존경하고, 그분들이 혹시라도 젊은 작가들 속에서 소외감을 느낄까봐 걱정한다. 은이는 그런 애다.


첫 시집을 출간하고 나는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억울했다. 왜 내 시를 몰라줄까? 속상했다. 그래서 나는 청탁을 받아도 시를 발표하지 않았다. 1년 넘게 그랬다. 시를 써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어느 날 은이에게 전화가 왔다. “형, <문예중앙> 가을호에 시 좀 발표해라.” 은이는 문예중앙 편집위원이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고맙다는 말도 했다. 모르겠다, 왜 그랬는지. 뭐가 고마웠지? 그냥 고마웠다. 나는 그때 바다를 보고 있었다. 서서. 계속 바다를 봤다. 이게 뭐라고, 이까짓 게 뭐라고, 이따위 시, 안 쓰면 되지…. 그러나 나는 정말 시가 쓰고 싶었고, 인정받고 싶었고, 유명해지고 싶었다. 그때 은이는 나를 보고 있었을까…. 그랬니, 은아?


은이는 스무살에 등단했다. 나는 서른살에 등단했다. 걔가 선배다. 빨리 등단하는 게 좋은 일은 아닌 것 같다. 은이가 등단했을 때 주변은 온통 나이 많은 선배들뿐이었다고 한다. 어딜 가도 막내였다. “몇년 동안 암흑기였어. 선배들 담배 심부름이나 하고. 주목도 못 받고. 이름만 시인이었어.” 언젠가 은이가 말해줬다. 이젠 주변에 자신보다 나이 많은 후배들이 많다. 이게 은이의, 이른바 ‘포지션’이다.


“올해를 돌이켜보니, 희망이 없는 시대에 제가 시인으로서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은 그 사람 입장이 되어보는 일, 이를 통해 시를 쓴 일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쓴 시들이 아마 다음 시집에 실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2015년 12월, 문학 월간지 <현대시학> 좌담에서 은이는 말했다. 나는 그때 거기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는 ‘세월호’ 그리고 이 시대의 약자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들이다. 은이도 나도 알았다. 경제가 이 모양인데, 도대체 언제까지 그딴 소리나 하고 있을래, 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 그래서 어떤 ‘어른’은 은이나 나 같은 젊은 애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역사 교과서를 빨리 국정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은이는 계속 시를 쓰고 있다…, 어찌 됐건 은이는 쓰고 있다. 이 시대를 기록하고 있다. 이 시대의 ‘그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부르고 있다. 나는 그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안다. 나는 시를 못 쓰고 있다. 사실은 쓰지 않고 있다. 쉽게, 나 혼자만 덜 아프려고. 은이의 두번째 시집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는 최근 누적 판매 1만권을 넘겼다. 시집이 1만권 넘게 팔리다니. <한겨레> 1면에 나올 일이다. 사람들이 시를 잘 안 읽는다. 시가 너무 어려워져서 그렇다고 불평불만도 늘어놓는다. 나는 그 말이 싫다. 그 말 때문에 시를 쉽게 쓰는 건 더 싫다. 나는 뭐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은이는 쓰고 있다. 성숙하게, 먼저 등단한 선배님답게, 세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그걸 다시 나름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끝까지, 결국 소통할 수 있는 지점이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쓰고 있다. 그런 은이를 보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인정받지 못해도, 시대가 너무 슬퍼도, 그래서 막막하고 괴로워도 “형, 뭐하고 있어? 시로 말해야지, 시인이 시로 증명해야지”라고 은이가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물론 반말로. “나, 오은이야, 내 말 들어.” 이렇게 호통치면서. 그렇지, 은아?


이우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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