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쉬는 기계
2015년 12월에 한 인터뷰_ARENA HOMME +
두산 베어스는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14년 만이었다. 김현수는 이 팀의 4번 타자였다.
미국 진출 의사를 밝혔습니다. 협상은 진행되고 있나요?
작년에 이미 에이전트를 선임했어요. 저는 일임을 했고, 지금은 기다리는 중이에요. 그리고 해외진출을 꼭 하겠다는 건 아니었어요. 좋은 제안이 들어오면 가는 거고, 아니면 뭐 국내 구단에 갈 수도 있죠. 가능성을 열어 놓은 상태에서 새 팀을 찾고 있습니다.
두산 팬들은 자신의 선수들이 다른 팀에 가는 것을 유난히 싫어합니다. 유난히, 정말 유난히.
그렇죠. 두산은 정말 그래요. 그건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두산은 옛날부터 그런 팀이었고, 두산 팬들 역시 그랬어요. 두산의 강점이죠. 하지만 제가 다른 팀에 가게 되면, 극복해내야 해요.
같은 팀인, 아니 같은 팀이었던 오재원 선수가 ‘국민 오재원’이 됐습니다. 두산을 제외한 거의 모든 팀 팬들이 오재원 선수를… 뭐 좋아하는 팬도 있었겠지만… ‘더티’하다고 생각하는 팬들이 훨씬 많았죠.
재원이 형이랑 친하기도 하지만, 친한 걸 떠나서, 재원이 형은 진짜 좋은 형이고 정말 착한 형인데, 그 형이 승부욕이 강해요. 우리 팀이 지난해 우승할 수 있었던 원동력 중 하나가 재원이 형이었다고 생각해요. 재원이 형이 주장이었잖아요. 다들 형을 좋아하고 따르고 믿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안타까웠어요. 다른 팀 선수들이나 팬들이 형을 얄미워하니까. 재원이 형 성격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포악하지는 않거든요. 가까이서 지내보면, 아, 좋은 사람이구나, 라는 걸 느낄 텐데. 정말 좋은 사람이죠.
두산이 지난해 가을야구에서 NC와 넥센을 모두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저는 이 팀들과의 경기가 한국시리즈보다 흥미로웠어요. 경기 전에 어땠어요?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나요?
아니요. 선수들끼리 재밌게 하자, 부담 갖지 말자, 이런 말을 많이 했어요. 감독님도 그러셨어요. 이기고 지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우리는 우리의 플레이를 하자, 어설프게 지지는 말자고. 그런 생각이 팀에 도움이 된 것 같아요. 해보자, 만약 내가 못하면 뒤에 나오는 선수들이 해줄 것이다. 경기를 치를수록 이런 믿음이 강해졌어요.
준 플레이오프 4차전에서 두산이 9회에 6 득점했습니다. 저는 한국시리즈를 포함해 남은 모든 경기를 가늠하는 신호였다고 생각해요. 넥센을 상대로 7점 차 뒤집기 쇼를 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9회에 그런 일이 생길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어요.
그렇죠. 저도 그렇고 우리 팀 중심 타자들이 못 치고 있었어요. 그런데 다 이런 생각을 했어요. 기회가 한 번은 온다. 그때 잘 치면 된다. 그리고 기회가 왔고, 모든 선수들이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도 기분이 좋아요. 그 한 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는 게.
두산이 우승 문턱에서 오랫동안 주저 않았잖아요. 특히 과거 SK와 한국시리즈는 아까운 순간이 너무 많았고요. 이런 모든 순간을 함께 하면서 혹시 스스로, 아, 나는 우승이랑 인연이 없나, 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어요?
그런 생각보다는, 아, 나만 잘하면 이길 텐데, 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렇게 이야기하면 제가 미안해지잖아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승하고 나서 이런 생각을 했어요. 아, 내가 이만큼만 했으면 우리가 진작 우승할 수 있었을 텐데. 물론 주저 않았던 시간들이 있으니까, 지금 이렇게 깨 달을 수도 있는 거겠죠.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어떻게 플레이해야 하고, 어떻게 슬럼프를 극복해야 하는지 올해 우승을 하면서 배웠어요. 많이 좋아요. 정말, 좋아요. 이 팀에 더 있을까, 더 해볼까, 이런 생각도 했어요.
두산 김태형 감독님이 신입 감독이신데, 부임한 해에 우승하셨어요. 굉장한 업적을 세우셨는데, 선수 입장에서 보기엔 어떤 분인가요? 평가를 한다기보다는 느낌을 묻는 거예요.
그렇죠, 제가 평가할 수는 없지만, 감독님은 선수들을 불편하게 안 하시려고 애쓰세요. 선수들에게 배려를 많이 해주세요. 그래서 저뿐만 아니라 두산 선수들이 편하게 야구를 했어요. 그리고 감독님은 선수들과 대화하기를 원하세요. 선수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듣고 싶어 하세요. 그러다 보니 선수들도 감독님이 어떤 생각을 하고 계신지 들을 수 있잖아요. 저는 그게 참 좋았어요.
지난해 김성근 감독님의 이른바 ‘스파르타 식 조련법’이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김태형 감독님은 정반대 스타일이라고 봐야 할 것 같아요. 김현수 선수는 어느 쪽이 잘 맞는지, 물론 후자겠지만.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내버려둬도 연습을 조금 하는 스타일이 아니에요. 저희 감독님은 스스로 판단하도록 맡기는 편이긴 했어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느껴야 한다고. 작년 초 전지훈련 때 자율 훈련 시간을 많이 주셨어요. 치고 싶은 사람은 치고, 수비하고 싶은 사람은 수비하고. 이런 시간이 기억에 남아요.
시즌이 끝나자마자 프리미어 12에 출전했습니다.
네. 프리미어 12 일본과의 경기 때도 9회에…. 사실 그 대회는 시즌 끝난 직후에 치르다 보니 피곤하긴 했어요. 그런데 (정)근우 형이 주장을 하고, (이)대호 형하고 (정)대현이 형이 계시니까 동생들은 편하게 경기했죠.
일본 투수 오타니의 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라요. 직구와 변화구를 그렇게 싱싱하게 섞어서 던지는 투수는 처음 봤어요. 특히 저는 그 투수의 리듬이 좋더라고요. 타이밍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리듬이었어요.
공이 눈에 익지 않았기 때문에 더 고전했어요. 이렇게 빠른 공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 공은 본 적이 없으니까. 예선전 때 어떻게 안타를 치긴 했지만, 결승전에선 삼진만 세 개 당했어요. 하지만 공은 더 잘 보였어요. 칠 수 없는 공이 아니에요. 톱클래스의 선수인 건 확실하지만.
삼진 당한 선수들이 고개를 뒤로 젖히며 아쉬워하는 반면, 김현수 선수는 뭔가를 곱씹는 표정을 짓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생각해보니 늘 그랬던 것 같아요.
네, 그게 제 스타일이에요. 칠 수 있다, 다음에 나가면 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들어오거든요.
배트에 볼을 맞추는 능력은 대한민국 최고가 아닐까요? 그런 재능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알았어요?
아니요. 잘 알지는 못했어요. 어릴 때는 우타, 주로 오른손으로 쳤어요. 그때는 파워히터였고, 약간 모 아니면 도였어요. 좌타로 바꾸고 난 다음에 컨택이 좋아졌어요. 우타일 때에는 힘만 셌어요. 우타에서 좌타로 바꾼 게 신의 한 수가 아니었나, 하하.
역대 일본과의 경기를 살펴보면 8회에 대한민국이 역전한 경우가 여러 번 있어요. 그런데 이번엔 8회에 점수를 못 냈죠… 그때 선수단 분위기는 어땠나요? 많은 시청자들이 8회 끝나고 TV를 껐을 거예요.
오오타니가 들어가고 노리모토가 나왔으니까 8회에는 한번 쳐보자고 다 같이 말을 했는데 이닝이 너무 쉽게 끝났죠. 하지만 9회에 (오)재원이 형이 대타로 타석에 섰을 때, 재원이 형이 출루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런 기대를 했어요. 조금만 더 해보자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요? 그 상황에서… 저는 기대를 안 했어요. 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야구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무조건. 국제대회에선 더 그렇죠.
그 순간에 타석에 섰어요.
너무 떨렸어요. 아, 그런 떨림을 진짜 오랜만에 느꼈어요. 그런데 뒤에 대호 형도 있고 병호 형도 있으니까, 죽어도 혼자만 죽자, 삼진 당하더라고 스윙을 강하게 하자, 생각했어요.
밀어내기로 점수를 냈고, 2대 3이 됐죠. 사구로 진루하는 것도 염두에 두고 있었던 거죠?
네. 스트라이크를 하나 보고 치려고 했어요. 기다렸던 게 주효했어요.
9회 선두 타자가 오재원 선수였고 마지막 타자도 오재원 선수였습니다. 2 아웃 만루 상황에서 홈런성 타구를 쳐냈어요. 그리고 배트를 던졌죠. 일본 선수들이랑 일본 팬들이 보면 기분 나빴겠지만, 저는 대한민국 사람이라 통쾌했어요.
저는 3루 주자여서 공만 쳐다봤어요. 그 공을 야수가 놓칠 줄 알았는데… 재원이 형이 배트를 일부러 던졌겠어요?
공처럼 날아갔어요, 배트가….
멀리 날아갔구나.
올해 시즌 성적을 보니 전 구단을 상대로 타율이 좋더라고요. 그렇게 고루 모든 구단 투수를 상대로 잘 치는 게 쉽지 않은데요.
그게 장점이자 단점이 아닐까요. 특별히 강한 것도 없고 약한 것도 없고.
루상에 주자가 나가 있을 때 홈으로 불러들이는 능력은 김현수가 최고죠.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하하.
메이저리그에 진출하게 되면 어떤 포지션을 맡고 싶어요?
포지션 상관없고, 어느 팀에 갈지도 상관없어요. 많이 뛸 수 있는 포지션, 많이 뛸 수 있는 팀이 중요해요.
동갑인 강정호 선수가 워낙 잘해서, 많은 사람들이 김현수도 3할을… 2할 후반 정도는 칠 거라고 기대하겠죠?
정호한테 절 해야죠. 정호가 한국 타자들의 점수를 올려줬죠. 하지만 기대는 조금 낮춰 주시면 좋겠어요.
친하죠, 강정호 선수랑.
네. 정호랑은 같은 팀에서 한번 뛰어보고 싶어요. 다른 동기들이랑은 많이 뛰어봤는데, 정호랑은 기회가 없었어요.
메이저리그 진출이 확정되고, 공항에서 출국 기자회견을 한다고 가정합시다. 앞에 마이크가 수십 개 있어요. 팬들에게 어떤 말을 하고 떠나실 건가요?
계속 응원해주셔서 감사하고, 제가 어려운 선택을 했는데도 지지해주셔서 감사하고, 큰 기대를 안고 나가는 만큼 최선을 다하겠지만, 성적이 안 좋아도 이해해주시고,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김현수 선수, 첫 해 목표를 말해주세요?
시합에 나가는 게 가장 큰 목표입니다. 주전으로 계속 출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려면 성적이 어느 정도 나와야겠죠.
100경기 이상 출장하면 만족하시겠습니까?
그거 가지고는 안 되죠. 더 많은 경기에 출전해야죠.
그런데 연봉은 얼마 받고 싶으세요?
그건 모르겠어요. 하하.
: 단 한 번도 김현수가 못 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한화팬이고, 김현수 팬이다. 김현수는 두산 선수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김현수를 좋아하지 않는 야구팬은 드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