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으로 보이는 둘이 청담역 1번 출구 앞에서 싸우고 있었다. 여자는 가고, 남자는 붙잡고, 여자는 뿌리치고 때리고, 남자는 소리 질렀다. 나는 이제 그렇게 하지 않는다. 더 이상 그럴 기운이 없다. 시계를 보니 6시 53분이었다. 이 시간에 나도 자주 싸웠다. 내가 약속 시간에 늦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6시 30분에 만나기로 했다. 6시에 퇴근하니까 6시 30분까지 청담역에 올 수 있다고 그녀는 늘 우겼다.
나는 학동역에 사무실이 있었고 그녀는 압구정 사거리에 사무실이 있었다. 그녀는 정시에 퇴근했고, 나는, 아니 정확하게 적자면 우리 팀 선배들은 6시가 돼도 집에 가지 않았다. 유부남 선배는 종종 말했다. “우성아, 당구 한 판 치고 갈까? 일찍 집에 가봐야 애 봐야 돼.” 그래서는 나는 늘 눈치를 보다가 퇴근했다.
약속 시간을 늦춘다고 달라졌을까? 별로. 어찌됐건 우리 팀 선배들은 집에 가는 걸 싫어했으니까. 그리고 약속 시간을 늦추는 건, 그녀의 말에 의하면 “오빠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거야”가 된다. “당연하지 않아? 나만 빨리 보고 싶은 거야? 오빠는 안 그래? 나도 이제 자존심 상하고 지쳐서 그만 하고 싶어.” 우리는 6시 50분부터 7시 30분 정도까지 늘 싸웠다. 지긋지긋하게.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둘 다 싸우는 걸 좋아했던 것 같다. 서로에 대한 마음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싶어서.
그녀와 나는 각각 결혼했다. 그녀는 다른 남자와, 나는 다른 여자와. 나는 이혼했고, 그녀는 모르겠다. 잘 살겠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길에서 싸우는 연인을 보며, 우리 그때 왜 저렇게 싸웠을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데 그때, 연인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지하철을 타러 내려가는데 문득 그녀의 전화번호가 머리에 딱, 떠올랐다. 011로 시작하는 번호.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동안 생각했다. 메시지를 보내 볼까? 하지만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무슨 할 말이 있다고 연락을 해? 라는 생각이 들기는 했지만 내 의지는 확고했다. 연락할 거야. 나는 문자 메시지를 적기 시작했다. 처음엔 ‘잘 지내? 나 우성이야.’라고 적었다. 밤늦게 술 마시고 연락하는 과거 남자 친구 같았다. 하긴 뭐 아닌 것도 아니지. 하지만 그 정도로 최악은 아니야,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래서 메시지를 지우다가 복구시킨 후 한 문장을 덧붙였다. ‘문득 네 생각이 났어’라고.
답장이 왔다. 심장이 멎는다는 게 뭔지, 그때 느꼈다. 메시지를 확인했다. 번호가 바뀌었다는 알림 메시지였다. 011에서 010으로. 웃었다. 안 웃으며 초라해지니까. 문자메시지가 연이어 계속 왔다. 엄마한테도 오고, 택배 아저씨한테도 오고, 5천만 원 빌려주겠다는 마음 씨 좋은 대부업체에서도 왔다. 아닌 걸 알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 때문에 심장이 뛰었다.
내려야 할 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지상으로 올라왔다. 찬바람을 쐬니 그제야 내가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알았다… 기보다는 원래 알았지만, 더 잘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럴 수 있어,라고 속으로 말하며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찌질’한 게 연애지 뭐. 이렇게 혼잣말도 했다. 파리바케뜨 매장 유리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예쁘게 매달려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는 벌써 지나갔고, 지금은 무려 2016년이다. 다들 그렇게 조금씩 늦게 깨달으며 사는 거 아니겠냐고, 괜찮다고, 나에게 말했다.
그때 나는 한 가지가 두려웠다. 정말 그녀가 답장을 보내는 것. ‘이제 연락 안 했으면 좋겠어’라고. 그런 연락이 오면 나는 또 한 번 이별하게 될 것 같았다. 너무 슬픈 이별일 텐데, 그 슬픔은 소환되지 말아야 할 슬픔이니까, 더 맵고 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문자가 오더라도 나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걸어야만 한다. 사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그저 혼자 자유롭게 살기엔 너무 넓은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으니까.
2016 02_heritage muine
_최악의 연애, 라는 주제였나... 청탁 받아서 쓴 글인데,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여러 감정의 결과로 만들어졌구나, 하는 생각. 그렇지, 그렇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