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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나미에 May 06. 2020

2. 경주 2/3

경주에서의 사계절

겨울의 대릉원과 찻집 아리솔

아무도 없어서 그랬다 (2015)

  나는 경주의 겨울을 가장 좋아한다. 겨울에 보았던 대릉원의 모습이 잊히지 않아 만물이 가장 볼품없어지는 계절임에도 불구하고 겨울이 되면 언제나 경주가 생각난다. 대학교 4학년이 되는 겨울방학 때였는데, 영화 ‘경주’를 보고 나서 배경 속에 녹아있는 인물들의 차분한 분위기가 여운이 계속 남아 영화 속 시간은 여름이었음에도 무작정 경주에 내려갔다. 그때가 처음 본 겨울의 경주였는데, 늘 북적대던 관광객도 산책하는 시민들 조차 거리에서 찾아볼 수 없고 ‘우리’만 덩그러니 이 넓은 유적지에 서있었다. 봄부터 가을까지 크고 웅장해서 특별한 풍경을 선사하지만 누군가가 죽어 묻혀있는 무덤인데, 그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고 소풍 온 느낌을 만끽한다. 누군가의 죽음을 깨닫고 괜히 숙연해질 필요는 없지만 죽은 자들이 모여있는 대릉원의 의미에 부합하는 계절은 오히려 쓸쓸한 겨울이 아닐까. 텅 빈 대릉원의 거대한 무덤 앞에서 우리의 기분도 함께 가라앉았다. 아마 취업을 앞두던 우리들의 무거운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 느낌은 여태까지 경주에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감정이었다.

겨울의 대릉원 (2015)


  추워서 체력이 빨리 떨어져서 그런지 주린 배를 부여잡고 대릉원 근처에 있는 아무 식당에 들어갔는데, 그곳의 보리밥 정식이 눈물 나게 맛있어서 싹싹 비웠다. 알고 보니 그곳은 주말이나 성수기에는 줄을 서는 맛집이었다. 겨울이어서 그저 사람이 없는 허름한 식당이라고만 생각했던 모양이다. 겨울의 쓸쓸함을 제대로 느껴보고자 했던 그 날의 마지막 목적지는 영화 속에 나왔던 찻집 ‘아리솔’이었다. 영화의 장면들을 곱씹어 보면서 신기한 듯 둘러보니, 영화 속에 나오던 춘화는 없었지만 찻집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주인공이 마셨던 황차는 얼어있던 우리 몸을 조금이나마 녹여주었다. 다른 손님도 없었고 따뜻한 물을 얼마나 많이 주셨던지 찻잎이 연하게 우려 나올 때까지 오랫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경주에 대릉원 앞 골목길을 따라 새로운 카페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지만 그때의 차가운 겨울 분위기에 제격인 곳은 오래된 옛날 찻집이었다. 몇 년 뒤 다시 그 근처를 지나가 보니 찻집은 없어져 있어 그 날 차를 마시며 따뜻한 방에서 몸을 지졌던 기억은 그때의 기억 하나로 오롯이 남았다.

찻집 아리솔 (2015)



봄의 보문호수와 첨성대

  경주의 봄을 즐기게 된 때는 사회생활을 시작한 후로, 겨우 3년이 넘었을 뿐이다. 초여름으로 접어들기 직전 첨성대 앞의 광활한 유채밭이 노란색 꽃을 마지막 힘을 내어 피고 있을 때부터, 만연한 봄이 되기 전 대릉원에 핀 목련이 봄의 시작을 알려주던 때와 김유신묘 입구의 벚꽃은 거의 다 지고 보문호수의 벚꽃이 절정이 이르던 때에 경주에 있었다. 항상 봄은 바쁜 시기이지만 휴무를 얻어 집에 내려가게 되면 이때가 기회라는 식으로 경주에 갔다. 그러고 보니 초등학교 수련회에서 불국사 유스호스텔에서 숙박한 이후로 약 20년 간 경주는 항상 당일치기였다. 매번 갈 때마다 한 장씩 받아서 찍는 스탬프 투어 종이만 해도 5장이 넘을 텐데 다 찍어본 적이 없다. 언젠가 꼭 이틀 이상 머물면서 16개 명소의 스탬프를 다 찍어 기념품을 받아보고 싶다. 


  초봄, 절정, 늦봄의 경주를 3년에 걸쳐 경험해보고 나서 언제가 경주에서 가장 즐기기 좋은 봄인가 라고 물으면 답을 할 수 없다. 초봄에도 대릉원에는 일찍부터 거대한 무덤 사이의 목련 앞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 줄을 서있고, 벚꽃이 절정인 시기에는 보문호수 근처 도로는 마비가 되어 차로는 움직이기 힘든 수준이 된다. 그나마 늦봄에 갔을 때에도 막 황리단길이 인기를 얻기 시작했을 때라 점심시간에는 웬만한 식당에서 줄을 서야 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봄은 1년 중 경주에 가장 크게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계절이다. 

대릉원 목련 (2018)

  봄의 경주가 궁금해지기 시작한 건 BTS 앨범 자켓 촬영지라는 것을 알고나서부터 였다. 직업 특성상 어느 매체든 특정 배경 혹은 장소에 대한 호기심이 강한 편인데, 만개한 벚꽃 아래서 불안한 소년들의 감정을 표현했던 그 앨범 사진들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사람이 많은 곳을 기피해서 여태까지 아예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봄의 경주와 역사적으로 남아있는 유적이 아닌, 국가발전단계에서 1970년대 가장 먼저 인위적으로 개발된 관광자원인 보문관광단지는 이제 쇠퇴한 관광지라는 인상이 강했다. 그러나 그곳의 벚꽃은 여전히 아름답고, 호수 주변으로 세련된 인테리어의 카페들이 생겨나면서 보문단지도 다시 살아나는 모양이다. 보문단지 연못에서 자켓을 찍은 BTS 덕에 처음으로 벚꽃 핀 보문호를 산책해보았다. 보문단지 주변으로 차가 막혀 꼼짝도 못 할 정도였는데, 봄 절정의 경주에서 촬영을 진행한 BTS의 담대함에 놀라면서도 평일 아침시간대면 한산한 경주의 봄을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부려보고 싶다.

BTS 화양연화 pt.1 Concept Photo (2015), 보문정 (2019)

  BTS의 경주 촬영지 두 번째 장소는 첨성대 유채밭이다. 넓고 평평한 대지에 외로이 우두커니 서있는 첨성대는 그 주위에 꽃밭이 둘러싸고 있지 않았더라면 역사유적으로서의 기능만 존재했을 뿐 사람들의 일상에 함께한다는 인상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봄에는 유채, 가을에는 핑크 뮬리와 함께하는 1,000년 전 천체 관측소의 모습은 앞으로도 계절마다 색을 바꿔가며 누군가의 사진 속에 자리할 것이다.

첨성대 유채밭 (2017, 2019)


  보문호수를 걷다 보니 건너편의 경주월드가 보였다. 중학생 때 학원에서 경주월드에 데려가 정말 눈물 나게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풀고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봄이었다. 늘 가까이에 두고 곱씹어보던 기억이 아니라 아주 오래된 기억의 파편을 찾아낸 것처럼 문득 떠오른 기억이었다. 이렇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경주의 또 다른 기억들이 머릿속 구석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어릴 적의 기억들과, 벚꽃 핀 호숫가에 멋진 카페가 생겼다는 것을 보고 제 발로 여기까지 찾아온 오늘날의 나, 어떤 계절이든 기억을 더듬거나 새로운 기대감으로 또 가게 될 수밖에 없는 많은 매력이 있는 도시이다. 


보문호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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