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에서의 사계절
여름의 분황사와 동궁과 월지
일본에서 사귀게 된 친구가 한국에 놀러 와 내일로 여행을 기획하면서 Korea Grand Tour 2014의 번외 편으로 다녀온 여름의 경주에 대한 기억이다.
고등학생 때 경주에 생겼던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자전거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당시로부터 5년 전, 자전거 사고가 났던 것은 분황사로 가던 길이었다. 사고를 치자마자 방향을 돌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탈 수밖에 없었는데,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려 버스터미널 앞에서 자전거를 빌리자마자 가장 처음으로 갔던 곳이 분황사이다. 국사 교과서에 나와있는 신라시대의 모전 석탑으로 유명한데, 돌덩이를 깎아서 올린 다른 석탑과는 달리 작은 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만든 특이한 석탑이다. 사진으로만 보던 석탑의 돌 쌓은 디테일이 고등학생 때나 지금이나 무척 궁금했다. 자전거를 타고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우리를 반겨주었던 것은 드넓은 황룡사지의 주황색 코스모스 밭이었다.
기동성이 좋은 자전거는 단숨에 대릉원과 첨성대를 지나쳐 안압지라고 불리던, 동궁과 월지까지 도달하게 해 주었다. 신라시대 화려한 부흥기를 엿볼 수 있는 동궁과 월지는 여름철이면 진분홍의 배롱나무가 녹음과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이 날 찍었던 사진들 중에 가장 시선을 끌었던 풍경이 배롱나무 사이로 보이는 호수에 비친 전각들의 모습이다. 인공호수를 만들어 신기한 동물까지 뛰놀게 하며 풍류를 즐겼던 신라의 전성기가 녹음이 절정에 달하는 늦여름 배롱나무를 통해 그 여운이 진하게 남는다.
사실 여름의 경주는 분지 지형 특성상 기온이 다른 곳 보다 높게 나타나기 때문에 한 여름에는 경주행을 자제하고 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불볕더위에 그늘이 거의 없는 유적지들을 걸어 다니는 것은 탈수와 탈진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가급적 선선한 날씨에 경주 방문을 추천한다.
가을의 불국사와 김유신묘
여름에 한국에 다녀갔던 일본 친구가 이듬해 늦가을에 다시 한번 부산을 찾아 부산에서만 쉬다가, 번외 편으로 경주에 같이 다시 갔다. 지난여름에 불국사와 석굴암까지 갔지만, 불국사에서 외국인 대상의 설문조사를 하다가 돌아볼 시간을 놓쳐 허겁지겁 버스를 타고 석굴암에 갔으나 보수공사로 부처님 얼굴만 슬쩍 보고 내려왔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역시 그러한 아쉬움이 있어야 다시 찾을 수 있는 것. 덕분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절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하필이면 불국사에 도착해서 비가 내렸는데, 단풍으로 물든 불국사 연못에 비가 내리니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보통 비가 내리면 바닥이 젖음과 함께 배경이 진해지면서 주인공의 모습이나 건물이 더 뚜렷하게 보이는데, 비가 잦아들기를 처마 밑에 서서 기다리면서 가을색과 함께 진해진 경내를 멍하니 쳐다봤다. 사실 불국사의 청운교 백운교나 석가탑, 다보탑, 황금돼지 정도만 보고 오자고 생각했었는데, 불국사가 빨강 노랑 주황 사방팔방으로 가을색을 입어 환상적인 절경을 내뿜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때 이후로 언제나 불국사는 내 마음속에 가을이다.
경주에 갈 때마다 위치는 구도심이지만 대릉원과 첨성대 유적지를 중심으로 교촌마을과 경주박물관 쪽과는 반대편에 있어 항상 건너뛰는 유적지가 있었다. 봉분 아래에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는 둘레돌로 유명한 김유신장군묘이다. 각 유적지의 위치를 알려주는 화살표에 항상 반대 방향으로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 있었지만, 걸어가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려 늘 포기했었다. 촬영 겸 부산에 내려와 있다가 휴일에 집 앞에서 자전거를 싣고 경주역에 내려 황남빵을 사들고 가장 먼저 페달을 밟은 곳이 김유신묘였는데, 그때가 11월이었다. 김유신묘로 향하는 벚꽃터널의 벚나무 이파리들은 이미 색이 바래 떨어지고 있었지만 단풍나무는 새빨간 색으로 덮여있었다. 일에 치여 온도차에 의해서만 계절의 변화를 느끼다가, 유적지 주변의 풍경에 의해 겨우 가을색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만 여태껏 외면했던 모양인지 꽤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곳이었다. 언젠가 또다시 좋은 계절에 스탬프 투어의 완성을 위해 가야 한다는 사실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겨울의 남산
연중 4인 가족이 모일 날이 며칠 안 되는 우리 가족의 여행 기억이다. 나는 일본에서 돌아와 휴학을 한 상태였고, 동생은 대학 입학 직전 집에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에는 KBS ‘1박 2일’이 여행지 선정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었는데, 유홍준 교수와 함께 했던 경주 여행에서 남산을 돌아봤던 편이 가족에게 큰 여운을 남겨 그 누구의 이견없이 경주, 남산행을 결정지었다. 장산을 집 바로 뒤에 둔 덕에 우리 가족은 산타는 데 일가견이 있는 터라 항상 산에 가면 군말 없이 따라갔는데, 경주 남산은 ‘산 타는 재미’를 느끼게 하는 독특한 산이었다. 그래서 계절과 상관없이 경주에서 누군가는 이 글을 보고 찾아가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남산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경주의 역사문화를 좋아하고 산이 주는 쾌감도 알아야 그 진가를 알아볼 것이다.
남산 자체는 그렇게 높지 않지만 (금오봉, 468m) 산속 군데군데 산재한 불상, 석탑을 찾아가는 길이 길고 험난한 덕에 산행을 하던 당시에는 왜 그렇게 힘들었나 모르겠다. 하지만 방송에 나와서 소개된 보물들을 찾아가는 재미와, 실제로 높은 산 위에 있는 석탑이나, 절벽에 서 있는 석불을 눈앞에서 보니 신기함이 더 압도적이었다. 등산로 입구의 전국에서 최고로 꼽히는 소나무 숲이 있는 삼릉을 지나 포석정, 나정 등 신라의 주요 역사를 담고 있는 사적지까지, 남산을 빼놓고는 경주를 다 봤다고 얘기할 수가 없다. 남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것도 맥락을 같이 한다. 그래서 꼭 한 번은 경주에서 남산을 경험해보기를 추천한다.
이렇게 경주는 어느 계절이든 다시 올 수 있도록 여운을 남긴다. 경주를 다시 찾게 만드는 것은, 소위 경주병에 걸리는 것은 예전의 기억과 그때의 계절이 풍겼던 냄새, 느꼈던 기분 때문이다. 이렇게 자주 가지만 아직 못 가본 곳들도 많다. 멀리 떨어져 있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양동마을과 옥산서원도 있고, 한 번도 스탬프를 찍어보지 못한 원성왕릉이나 동리목월문학관도 있다. 언젠가 또 경주에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할 날이 오면 훌쩍 떠나고 말 것이다. 경주는 우리나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보물 같은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