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장한 설악산과 검푸른 바다의 낭만
여름 속초 기피 현상
입사 후 첫여름 휴가 때는 나의 첫차 모닝을 타고 강원도를 한 바퀴 돌았다. 정선과 동해시에 갔을 때만 해도 별이 쏟아지는 산 위에서 캠핑을 하거나 산골 분교를 개조한 게스트하우스에서 시원한 강원도의 여름을 듬뿍 느끼면서 휴가를 즐겼다. 그리고 포켓몬 모바일 게임이 정식으로 국내에 제공되지 않던 때에 양양 ~ 속초 일대에서 게임을 정상적으로 실행할 수 있다는 얘기에 사람들이 포켓몬을 하러 속초에 몰리던 시기였다. 이왕 강원도에 왔으니 유행 따라 ‘포켓몬 고’를 다운로드하여서 양양 낙산사부터 포켓몬을 잡았더니 속초에 가서도 계속 핸드폰만 부여잡고 걸어가면서 포켓몬을 잡았다. 그것이 첫 여행만큼 설렘과 좋은 기억을 주었는가 하면 아니다.
사실 4년 전 처음 보았던 뚜렷하게 보이는 설악산의 산새와 검푸른 바다를 다시 볼 수 있을까라는 기대감에 속초에 갔지만 비 온 뒤 습한 날씨에 안개에 가린 설악산과 푸르다 못해 연한 초록색을 띄고 있던 바다의 색깔에 실망했고, 새롭게 둘러본 여행지인 청초호와 속초해수욕장에서도 포켓몬 고만 하느라 경관을 제대로 즐길 수 없었다. 심지어 함께 여행한 친구와도 서로 말수가 줄었다. 어느 도시여도 장마철 날씨는 우리에게 기대만큼의 풍경을 선사하지는 않는다. 여름 속초의 첫인상이 별로여서 그런지 여름날 가게 되면 항상 장마철이었고, 맑은 여름 하늘 아래의 푸른 설악산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속초여행 콘텐츠
일상에서 속초로 떠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설악산과 동해바다가 주는 자연의 정취도 있지만 최근에 발길을 이끄는 힘은 새로운 여행 장소들이 생겼다는 것이고 또다시 가보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17년도 겨울에 떠났던 1박 2일 강원도 여행에서 속초를 다시 찾았을 때, 지난 여행에서 지나쳐 왔던 속초의 문화 콘텐츠를 즐겨보고 싶어서 속초의 길거리를 느린 걸음으로 걸었다. 시외버스 터미널 뒷골목에서 마주쳤던 “완벽한 날들”은 ‘게스트하우스’와 ‘서점’을 함께 갖추고 있는 단독 건물이라 유독 관심이 갔는데, 서점 주인도 해보고 싶고 민박집주인도 해보고 싶은 내 마음에 걸맞은 이상적인 조합이었다.
중앙시장과 로데오거리를 지나 앞의 중앙로에는 ‘문우당서림’이, 뒤쪽의 수복로에는 ‘동아서적’이 자리 잡고 있다. 속초 서점계의 터줏대감 격으로 오래된 서점들인데, 동아서적은 지역 서점이 주목 받음과 동시에 독특한 큐레이팅이 전국적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문우당서림은 대형 서점임에도 독립 서적을 취급하면서 책을 구매할 때 따뜻한 감성까지 느낄 수 있다. 프랜차이즈 서점들이 우세한 우리나라 서점의 현실에서 지방의 영세한 서점이 자리를 굳게 지켜 사람들의 발길을 계속 끌고 있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인 일이다. 잠시 부산의 이야기를 하자면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오던 서면의 ‘동보서적’ 남포동의 ‘문우당서점’이 문을 닫았고 남포동의 중심에 있던 ‘남포문고’가 옆쪽으로 이전했다. 얼마 전 ‘문우당서점’이 중앙동 골목의 작은 빌딩 2층에 위치해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자갈치 시장 앞 대로변 큰 서점 건물 안에서 책을 찾으려고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했던 문우당서점에서의 옛 기억이 떠올라 씁쓸했다. 그때의 부산의 서점들이 프랜차이즈 서점과 달리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자기만의 개성을 가진 독립서점을 일부러라도 찾아가는 지금 시대에 사라져 버린 어릴 적의 지역 서점들이 아쉽다.
속초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 ‘도자기 별’이라고 하는 기념품 가게이다. 여행을 하면 그 지역의 엽서 파는 곳을 찾는데, 속초 엽서 파는 곳을 찾다 알게 된 곳이다. 도예를 하는 자매가 운영하면서 일상 도자기 소품이나 속초의 정체성을 담아 만든 자석, 엽서, 컵 등을 판매하는 곳인데, 원래는 동아서적 맞은편에 있다 지금은 고성의 봉포 앞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이전하여 카페와 함께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전한 곳도 속초 시내에서 1-1번 버스를 타면 바로 갈 수 있어 접근성이 나쁘지 않다. 사실 속초해수욕장보다는, 청간정, 아야진 등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를 볼 수 있는 고성의 아기자기한 해변을 더 좋아한다. 풍경이 예쁜 고성 바다 앞에서 만들고 판매하는 것이 그날그날 다르니, 오늘은 어떤 예쁜 것들이 있을까 기대하며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릴 수 있는 곳이라, 그 기대감으로 오늘 하루를 살고 있다.
양양고속도로가 개통된 이후로 속초는 서울에서 당일치기로 갔다 올 수 있는 도시라, 늘 보던 도시의 풍경이 아닌 좋아하는 풍경을 보고 싶을 때 훌쩍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한다. 하지만 몇 없는 휴일에 집안을 돌보지 않고 그렇게 쓰기에는 또 아쉬워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바로 떠나야지라고 속초행을 미루고만 있다. 그렇게 설악산이 깨끗하게 보이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처음 속초에 가서 갯배를 타고 아바이마을로 건너간 순간에도 설악산은 언제나 시야에 있었다. 설악산을 매일 볼 수 있는 속초 사람들이 부러워졌다. 그리고 지금도 부러워하고 있다. 하지만 올림픽이 열렸던 강릉이나 평창이 그랬듯이, 도시는 항상 개발의 굴레 속에 있고 속초도 그 타깃이 되었다. 멀지 않은 미래에 KTX 역이 생겨 기차로도 편하게 갈 수 있고, 고도제한이 풀려 높은 아파트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곧 내가 알던 속초의 풍경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고, 닭강정을 먹었던 게스트하우스도 재개발 때문에 사라질지도 모르고, 영금정에서도 고층아파트에 가로막혀 설악산의 절경을 제대로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비록 설악산의 오색약수터 케이블카는 막아냈지만,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사라져 가고 바뀌어가는 도시의 모든 것 때문에 소중한 기억이라도 잃지 않기 위해 애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