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run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우성 Nov 25. 2018

공기가 바람이 될 때

초등학생이었을 때, 달리기 시합에 나가면 늘 1등을 했다. 하지만 학교에서 가장 잘 달린 것도 아니고, 반에서 가장 잘 달린 것도 아니었다. 7~8명이 조를 이뤄 달리면 거기에서 1등을 하거나… 솔직히 적자면 가끔 2등도 하는, 그 정도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학교 대표로 큰 대회에 나갔다. 왜 그렇게 됐지? 선생님이 “이우성, 너가 나가!”라고 했던 게 기억난다. 그때 나는 지금의 나만큼 컸다. 그러니까 그때는 컸고 지금은 작다. (음, 덩치가 커서 대표로 뽑혔나?) 

나는 200미터 달리기에 출전했다. 다른 학교 대표 애들은 대부분 나보다 컸다. 그때 성장이 멈추었더라도 지금도 크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몇 명은 스파이크를 신고 있었다. 하지만 7~8명이 조를 이뤄 달리는 거라서 당연히 상위권에 들 거라고 믿었다. 탕 소리가 났다. 모두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몇 미터 달리지 못하고 넘어졌다. 결국 가장 늦게 결승선을 지나갔다. 꼴찌…. 생애 첫 번째 꼴찌. 그날 이후 30년을 더 살았는데 한 번도 꼴찌를 한 적이 없다. 꼴찌를 한다는 거,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날, 같이 대회에 나간 친구들에게 말했다. “넘어져서 꼴찌한 거야.”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안 넘어지고 달렸더라도 꼴찌를 했을 것이다. 다들 나보다 압도적으로 빨랐으니까. 일어나서 혼자 달리면서 나는 슬프고 화가 나고 무서웠다. 모래 바람이 불었다. 앞서 달린 애들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나는 뒤에서 모래를 코로 들이마시며 좇아갔다. 

그날… 아빠가 왔었다. 다른 애들은 부모님이 아무도 안 왔는데, 우리 아빠는 왔다. 그래서 우리 아빠만 아들이 꼴찌하는 걸 봤다. 대회가 끝나고 체육 선생님이랑 친구들이랑 다 같이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먹었다. 딸기도 먹었다. 선생님이 말했다. “여러분, 딸기는 여기 앉아 계신 우성이 아버님께서 사 주신 거예요. 다 같이 감사합니다,라고 말해볼까?” “감사합니다.”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다신 달리기 같은 거 안 할 거라고 속으로 말했다. 짜장면도 딸기도 맛있게 먹었다. 그러지 않으면 아빠가 슬퍼할 것 같아서.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었다. 나는 가끔 집 근처 공원을 달렸다. 누가 달리라고 시킨 적도 없고 다이어트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냥 뛰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한 개 있다. 나는 언제나 한 걸음 더 뛸 수 있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지쳐 주저앉아도, 나는 한 걸음 더 뛸 자신이 있었다. 삶이 힘들게 하고 바람이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도 나는 더 뛸 수 있었다. 나는 주저 않지는 않는다. 나는 빨리 가는 것에 관심이 없어졌다. 다만 오래 달리고 싶었다. 나는 이기기 위해 달리지 않게 되었다. 그저 누구도 가본 적 없는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나보다 덩치 크고 빠른 운동부 애들도 갈 수 없는 곳에 나는 언젠가 가고 싶었다. 아마도 그곳은 내 안에 있는 어떤 세계일 것이다. 마음이 차갑고 외로울 때 나는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조용히 달린다. 달리면 나는 거의 지워질 것 같다. 나는 그 감각을 사랑한다. 나는 늘 달렸고 여전히 달린다. 나는 빠르지 않고 열심히 달리지도 않는다. 빨라지고 싶지 않고 열심히 달리고 싶지도 않다. 달리면 공기가 바람이 된다. 내 얼굴을 만지고 지나간다. 그때만큼 행복한 시간이 나에게는 음… 드물 것이다. 지금 나는 <러너스월드>를 만든다. 한 걸음 한 걸음 더 달려서 이곳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RUNNER'S WORLD KOREA> 2018. 04 편집장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