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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Nov 25. 2018

그녀의 달리기


내가 한심한 남자여서일까… 여자가 남자보다 달리기를 못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까지는 아니지만, 뭐, 딱히 잘하지는 않는다고는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잘 달리는 여자가 많다는 걸 안다. 나는 26세 가을에 첫 풀코스를 달렸다. 달리는 내내 수많은 여자들이 나를 앞서갔다. 그녀들을 보며, 달리기엔 남자도 여자도 없으며 오직 얼마나 오래 훈련해왔는가 만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다. 그걸 잘 알면서도 누군가 그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나보다 느릴 거라고 속단해버리는 것이다. 머저리 같지 않아? 자존심 때문인가…. 

A는 내 친구 부인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클라이밍을 해왔다. 클라이밍을 더 잘하기 위해 적게 먹고 살을 빼고 코어 훈련을 한다. 그러나 러닝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지난 3개월 간 진행된 <러너스월드>와 리복의 ‘10K 러닝 세션_리복’에 참가했다. 그녀는 진지하게 달렸다. 폼이 엉성하고 발도 빠르지 않았다. 그러나 끝까지 달렸다. 우리는 매주 한 번 혹독한 수준의 인터벌 러닝을 했는데, 나는 페이스를 맞추기 위해 애를 쓰다 번번이 낙오했고, 그녀는… 그래도… 끝까지 달려 정해진 거리를 채웠다. 나는 그녀가 끈기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낙오하는 나보다 빠를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내가 남자여서? 그래, 그랬겠지. 아, 내가 빨랐던 건 맞다. 세션 첫 시간에 3000미터 달리기를 했는데, 그녀보다 먼저 들어왔으니까. 심지어 나는 열심히 달리지도 않았다.  

열심히 달리지도 않았으니까, 라…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그때부터 지고 있었다. 그녀는 열심히 달려서 나보다 늦게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고통을 견디며, 한계를 극복하는 힘을 기르게 되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랜 시간 그랬을 것이다. 진지한 클라이머로서, 한계를 맞닥뜨리며, 그걸 극복하는 시간을 보내왔을 것이다. 힘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그녀가 나보다 잘 아는 건 당연하다. 살면서 나도 가끔은 진지하게 극한의 상황을 극복해오긴 했겠지만, 더 많은 경우에 적당히 타협해버렸다. 벽을 향해 돌진하며, 안간힘을 쓰는 사람을 보면, 굳이 왜 저렇게까지 해,라고 난해한 표정을 짓기도 했으니까. 그런 내가 강할리 없지 않은가. 

5월 13일 ‘10K 러닝 세션_리복’에 참가한 스무 명의 러너들과 <러너스월드> 기자들, 리복의 관계자들이 소아암환우돕기 서울시민마라톤대회 10K에 출전했다. 나는 목표했던 기록이 있었다. 최근 한 대회에서 2초 차이로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내심 기대하며 출발했다. 6킬로미터쯤 지났을 때 페이스가 떨어졌다. 목표한 시간에 완주하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어떻게든 버텨야 했을 것이다. 나는 점점 느려졌다. 나는 잘 알았다. 그녀가 나보다 앞에서 달리고 있다는 걸. 간격은 더 멀어졌다. 나는 졌다.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그녀는 자신이 세운 목표를 달성했다. 내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기록이었다. 1분 30초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조금만 견딜 수 있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조금을 견딜 수 없었다. 몸은 정직하다. 단련된 만큼만 달린다. 누군가 평소보다 잘 달렸다면 그만큼 훈련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며, 그저 그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누워서 하늘을 보았다. 구름이 가득했다. 땀이 마구 흘렀다. 나는 약했다. 나는 언제나 나에게 졌다. 새삼스러운 순간이 아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계를 뛰어넘게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그날, 나는 무겁고 아프게 느꼈다. 남자라서 더 잘 달리는 게 아니다. 여자라서 못 달리는 것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는 자신의 한계를 붙들고 늘어져 마침내 무너뜨린다. 다른 누군가는 속도를 줄이며 편안해지는 길을 택한다. 

왜 조금 더 달려보지 못했을까… 며칠 동안 나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 목표했던 기록을 마음에서 지워버렸다. 나에게 중요한 건 그런 숫자 같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부끄러워서 시선은 다른 곳에 두고. 존경한다고. 아마 그녀는 내가 뭐라고 하는지 못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 그 마음을 차분하게 온전히 옮겨 적는다. 당신이 훈련하며 달린 모든 거리를, 그 순간의 당신을 존경한다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한 명의 러너로서. (그런 마음으로, 지난 3개월간 함께 달린 스무 명의 러너들 모두, 존경합니다.)

요즘 나는 한계를 향해 달리고 있다. 


<RUNNER'S WORLD KOREA> 2018. 06 편집장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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