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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Nov 25. 2018

착각일 수도 있지만



2017년 5월 6일 이탈리아 몬자 레이싱 트랙에서 나이키 ‘브레이킹 2’ 프로젝트가 열렸다. 엘리우드 킵초게, 렐리사 데시사, 제르세네이 타데시가 참가했다. 풀코스 마라톤을 2시간 안에 들어오는 게 목표였다. 군집을 이룬 페이서들이 교대로 선수들 앞을 달리며 바람을 막았다. 그 외에도 기록 달성에 도움이 되는 여러 환경이 갖춰진 대회였다. 

그때 나는 그곳에 있었다. 선두에 선 킵초게가 레이싱 트랙을 발로 17바퀴 달리는 동안 내내 지켜보았다. 그는 2시간 25초의 기록으로 레이스를 마쳤다. 종전 세계 신기록을 넘어선 기록이었다. 브레이킹 2를 달성하진 못했지만 현장은 축제 분위기였다. 도전 자체가 무모했고, 한편으로는 그래서 위대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목표가 이루어질 수도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기자회견장에서 킵초게는 말했다. “인류에게 겨우 25초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 그 순간, 마라톤의 역사에 깊이 각인될 위대한 러너가 탄생한 것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마라톤 선수로 데뷔한 이후 엘리우드 킵초게는 참여하는 대부분의 대회에서 우승했다. 그런데 나는 그가 달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치 깊은 명상에 빠진 승려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는 평정심을 유지하며 원대한 세계를 꿈꾼다. 달리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낯설고 광활한 어떤 세계에 첫 발을 내딛기 위해 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달릴 때 그는 인상을 쓰는 법이 없고, 표정의 변화도 많지 않다. 그는 미소를 띠며 달린다. 그 모습을 오래 보고 있으면 그가 이미 ‘마음’에서 다른 선수를 이겼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는 다른 선수들을 이기기 위해 달리는 게 아닐 것이다. 그는 마치 이곳, 이 세계의 러너가 아닌 것만 같다. “인류에게 이제 겨우 25초가 남아 있을 뿐입니다”라는 언어는 그저 한 문장이 아니다. 이 말에는 ‘미지’가 담겨 있고, 그곳에 가장 가깝게 다가간 사람은 킵초게 자신이다. 그는 여기 없다. 

9월 16일 킵초게가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2시간 1분 49초의 기록으로 풀 코스 세계 신기록을 달성했다. 그러나 내가 놀라운 건 이런 결과가 아니다. 기록은 언제든 깨질 수 있었다. 연습 레이스 때 킵초게는 여러 차례 세계 신기록보다 빨리 달렸다고 알려져 있다. 작년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서 우승한 이후 킵초게는 대회에 출전하지 않았다. 1년 만에 같은 대회에 참가한 그는 자신이 마땅히 가야 할 자리에 돌아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의 목표는 우승이 아니었다. 하프 코스를 지난 시점에서 그의 우승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의 목표는 세계 기록을 달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초반부터 종전의 세계 신기록 페이스보다 빨리 달렸다.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새로운 세계 기록이 달성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킵초게가 싸운 시간은 완전히 낯선 세계로 가는 시간이었다. 우승, 세계 신기록은 그를 제외한 사람들이 입에 올리는 것들이다. 그는 그저 자신의 고요한 마음속으로, 그 광활하고 낯선 우주로 얼마나 더 깊이 더 멀리 갈 수 있는지 도전하고 있었다. 숭고하고 위대한 몸짓이었다. 역사 앞에서 마라톤 선수는 기록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이름보다 그의 기록이 더 많이 회자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킵초게는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러너는 아니다. 물론 이건 매우 성급한 판단일 것이다. 하지만 달리는 모습을 자세히 오래 지켜보고 있으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어떤 선수는 신체의 한계, 자신의 의지력과 투쟁한다. 몸을 이겨내야만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들 틈에서, 아니 그들 앞에서 한 명의 선수는 몸과 화해하며 자신의 의지와 대화를 나눈다. 마치 명상을 하듯이 달린다. 이런 모습들은 기록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다시 나에게 묻는 것이다. 나는 어디로 가기 위해 달리는가. 달리기를 시작한 이후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을까? 나는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떤 일이든 거뜬히 해내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나 자신의 무기력을 미래로 가는 에너지로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가끔은, 아니 어쩌면 매일 밤,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달렸다. 나는 어디에 와 있을까? 이 물음에 답하고 싶다. 가을이 되었고, 요즘은 종종 바람의 손을 잡고 달린다. 고백하자면 나는, 달리기에 어떤 의미나 목적을 부여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아니야, 그럴 필요는 없고, 너는 그저 달리고 있을 뿐이야. 뱃살이 좀 빠지겠지,라고 웃어넘긴다. 그러나 모든 달리기가 겨우 그 정도 행위일 거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아무리 과소평가해도 나는 어딘가로 분명히 가고 있을 것이다. 킵초게가 그랬듯. 착각일 수도 있지만, 착각이 아닐 것이다. 


<RUNNER'S WORLD KOREA> 2018. 10 편집장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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